나생문『羅生門(Rashõmon)』, 덤불 속『藪の中(Yabu no naka)』
그리고 영화 <Rashõmon>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김동근 옮김, 소와다리, 2015년 -
목차
1. 서언
(1) 작가소개
(2) 나생문, 덤불 속 그리고 라쇼몽
(3) 아쿠타가와의 시대의식
2. 본문
(1) 극중 인물 소개
(2) 소설과 영화의 줄거리
(3) 소설의 영화적 변용
(4) 에고이즘을 통한 인간상 분석
3. 결언
(1) 인상 깊은 구절 또는 장면
(2) 감상평
4. 참고 문헌
1. 서언
본 요약서에서 『나생문』과 『덤불 속』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의미하며,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의미한다는 점을 유념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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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작가 소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 1892~1927
다이쇼 시대를 대표하는 근대 일본의 소설가
1892년 3월 1일, 도쿄의 우유 제조판매업자 니하라 도시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정신병으로 양육이 어렵게 되자 12세 되던 해에 외삼촌의 양자로 들어 갔고, 이때부터 외가 쪽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되었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영문학과에 입학, 1914년 고등학교 동기 기쿠치 간 등과 함께 문학동인지 「신사조」를 간행,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여 작가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15년 대표작 『나생문』을 본명으로 발표한 것을 계기로 나쓰메 소세키 문하로 들어갔다. 널리 알려진 작품의 대부분은 단편이며 고전에서 소재를 취한 것이 많은데, 인간 내면의 이기적이고 모순된 심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
1921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취재기자로 중국에 체류하면서 집필을 잠시 멈추었고, 스트레스와 갖가지 병에 시달리며 4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얻은 것으로 생각되는 신경쇠약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만년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로 인해 그의 소설은 점차로 사소설적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이러한 심경이 소설 『톱니바퀴』에 나타나 있다.
1927년 7월 24일,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몇몇 지인들 앞으로 편지와 원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여 자살했다. 향년 35세.
그로부터 8년 후인 1935년, 일생의 친구이며 소설가이자 문예춘추 출판사 설립자인 가쿠치 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상’을 제정, 촉망받는 신인 작가에게 이를 수여하도록 한 것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1]
(2)나생문, 덤불 속, 그리고 라쇼몽
아쿠타가와는 『나생문』에서 헤이안 시대 말기 계속 된 재화(災禍) 때문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마침내 연고자가 없는 시체를 갖다 버리는 장소로 전락해버린 나생문을 배경으로, 주인으로부터 쫓겨난 하인이 나생문의 다락 위에서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행동을 보고 노파의 옷을 빼앗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여줌으로써, 도저히 악으로의 용기가 나지 않는 하인이 노파가 살기 위해 보여주는 에고이즘(egoism)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악을 향해 서슴없이 달려가는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을 해도 좋다는 이기주의를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덤불 속』에서는,‘덤불 속’에서 무사의 아내가 도적 다조마루에게 강간을 당했고 무사는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을 작가는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고 단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다중 인물의 시점으로 7개의 증언과 진술을 병치함으로써, ‘덤불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린다. 『덤불 속』에서 작가는 위의 증언들과 진술들을 제 3자의 위치에서 서술하면서 “비웃는 미소”, “의기양양한 태도”, “긴 침묵” 등의 영화적 지문만을 추가함으로써 사건과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이러한 다중 인물의 시점을 택한 의도는 “과연 누가 살인자인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의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진술인 전반부 네 개의 이야기에서는 다조마루가 범인이고 부부가 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이 떠오르지만, 후반부 당사자 세 명의 진술로 들어가면 그들은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고백하는 등, 하나의 사건이 다양한 양상으로 제시되어 ‘덤불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말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과 함께 진실과 인간 신뢰도 함께 미궁 속으로 빠뜨림으로써, 인간의 자기 합리화와 이 자기 합리화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이기주의는 과연 진실과 공존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구로사와 감독은 두 원작 소설을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보고서, 영화 <라쇼몽>에서 『나생문』을 현재로 그리고 『덤불 속』을 과거로 교직 시키고 있는데, 제목과 공간의 상징적 분위기는 『나생문』에서, 그리고 미스터리한 사건은 『덤불 속』에서 가져온 것이다. 감독은 다조마루, 무사의 아내, 살해된 남편 그리고 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이 각각 일인칭 시점으로 같은 사건을 플래시백 형태로 다르게 표현하는 다중시점 기법을 통해 서술함으로써, 결국 중점은 누가 진실을 말하는 가가 아니라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 남게 만든다. 이처럼 감독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허무주의로 분위기를 끌어가는 점에서는 아쿠타가와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영화 감독으로서 구로사와는 원작 소설과는 달리, 각색을 통해서 나무꾼의 역할을 강화 시키고 아기를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원작 소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넘어서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휴머니즘을 제시했다.[2]
(3)아쿠타가와의 시대의식
아쿠타가와의 시대의식은 회의적이고 냉소적이다. 아쿠타가와는 1920년대에 확대일로에 있었던 일본사회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다수의 관련 서적을 접하고 실제 그와 관련된 작품을 쓰기도 한다. 아쿠타가와는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회의적이며 냉소적인 양면성을 띄고 있다. 그것은 양자로서 장자로서 양부모를 부양 해야 하는, 봉건적 도덕의 의무를 철저히 수행해야하는 위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쿠타가와의 청소년기에 있었던 러일전쟁을 통해서 이쿠타가와는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를 경험했고, 이러한 경험이 그에게서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을 잉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본이 서구와 처음으로 대립했던 러일전쟁 중에 아쿠타가와는 전쟁과 내셔널리즘의 관계에서 자연스러운 등식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쿠타가와는 시대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있었으며 다양한 습작을 통해 그가 시대적 조류에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쿠타가와는 내셔널리즘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이념에 거의 거부 반응 없이 수용하고 잇다. 그런데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제국주의와 관련된 초기 습작 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반기를 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 습작인 『나생문』에서 하인이 어떻게 도둑이 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층민 노동자의 모습이 중층적으로 발견된다. 작품에서 하인은 주인에게 쫓겨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것이 도둑으로 귀결할 것이 암시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하인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생계를 이어가려는 노파에 반하여 자신 또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노파가 입고 있던 옷을 뺏는 도둑의 행동을 한다. 이것은 노파에게서 하인에게로 이어지는 악순환하는 노동자의 삶이 중층적으로 겹쳐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하인의 행방을 알 수 없듯이 하인의 모습을 노동자의 모습으로 본다면 이들 노동자들의 삶을 방관만 하고 있으면 결국에는 그들의 행방은 어쩔 수 없이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사회의 악(惡)적인 존재인 ‘도둑’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3]
또한 『나생문』이 일본에서 알려질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이후 자본주의가 차츰 발전하여 국력의 신장을 보였지만,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에 동반한 내부 모순도 나타나,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러한 사회문제 속에서 일본지식인의 정신적인 동요와 변모 그리고 일본사회가 급격히 근대화로 향해 변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인간의 내적갈등으로 일어나는 에고이즘 문제와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이 시대적 배경으로 작품 속에도 나타나 있다.[4]
2. 본문
(1) 극중 인물 소개
a. 하인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여 도둑이 될 것인가 아니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린 상황에 도착한 나생문에서 노파를 목격한다.
b. 노파
자신의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선의 얼굴로 가장해서 자신의 내면을 숨긴 채, 오로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죽은 사람의 머리털을 뽑아서라도 살아가려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2) 소설 『덤불 속』
a. 나무꾼
덤불 속에서 자신이 시체를 처음 발견했으며, 밧줄과 빗만 보았다고 진술한다.
b. 행려승
세키야마에서 야마시나로 가던 도중에 그 시체의 사나이와 말을 탄 여자를 보았다고 진술한다.
c. 나졸
다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계집을 좋아하는 도적이라고 진술한다.
d. 노파
사위인 무사와 딸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딸이 정숙한 아이임을 진술한다.
e. 다조마루
욕망 때문에 여자를 강간한 후, 여자가 둘 중 살아 남은 사내를 따라가겠다고 말하여 결투 끝에 무사를 죽였는데 여자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고 진술한다.
f. 무사의 아내
남편의 차가운 눈빛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단도로 남편을 죽였고, 자신은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고 진술한다.
g. 무당의 입을 빌린 무사의 혼령
아내가 자신을 강간한 도적에게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하자 분노를 느껴 그에게 아내를 죽이라고 했고, 아내가 도망간 후 도적이 밧줄을 풀어줘서 자신은 단도로 자결했다고 진술한다.
3) 영화 <라쇼몽>
a. 나무꾼
덤불 속에서 시체를 처음 발견한 자로서, 나생문에 앉아 행인에게 살인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만, 자신은 단검을 차지할 목적으로 재판장에서 위증을 했음을 고백하고 자신이 제3자의 시선으로 본 사건의 진상을 말한다.
b. 행려승
길을 가던 도중에 죽은 무사와 말을 탄 여자를 본 자로서 다조마루의 소지품이 죽은 무사의 것임을 증언한다. 가장 객관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물이지만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나무꾼과 같이 나생문에 앉아 행인에게 살인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에 대해 번뇌한다.
c. 행인
나생문에서 나무꾼과 행려승이 재판정에서 보고 들은 바를 듣는 자로서, 행려승에게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나무꾼에게는 위증한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d. 나졸
다조마루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그를 체포했으며, 재판관에게 다조마루를 체포한 것에 대해 칭찬을 듣고 싶어한다.
e. 다조마루
무사를 속여 그를 결박한 후 그가 보는 앞에서 무사의 아내를 강간한 후, 그녀가 두 남자가 결투를 벌여 이긴 이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무사와 결투 끝에 그를 죽였는데 여자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고 진술한다.
f. 무사의 아내
단도로 남편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했지만 자신을 경멸하는 남편의 차가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여 기절했는데 깨어나 보니 죽은 남편의 가슴 위에 단도가 있었고, 그 때문에 자신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를 못했다고 진술한다.
g. 무당의 입을 빌린 무사의 혼령
아내는 다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했고, 이에 자신은 심한 질투를 느꼈으며 도적이 그녀를 걷어차자 그녀는 도망쳤고, 도적은 밧줄을 끊어주고 사라졌고 자신은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여 단도로 자결했다고 진술한다.
h. 아기
나생문에 버려진 아기로서 후에 나무꾼이 키우기 위해 데려간다.
(2)소설과 영화의 줄거리
1) 소설 『나생문』의 줄거리
4, 5일 전에 주인으로부터 쫓겨난 하인이 나생문에서 비를 피하며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비를 피하고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그는 나생문의 위층으로 올라간다. 올라보니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 한 노파가 여인의 시신에서 머리를 뽑고 있다. 칼을 들고 위협하는 하인에 놀란 노파는 싹싹 빌면서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 요량으로 이 노릇도 안 하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쩌란 말이냐며 변명하였다. 또한 이 여자는 뱀 말린 것을 생선 말린 것으로 속여 팔던 장사치라서 당해도 싸다고 주장한다. 이에 하인은 노파의 옷을 빼앗아 어둠속으로 사라진다.[5]
2) 소설 『덤불 속』의 줄거리
소설은 동일한 한 무사의 죽음을 둘러싼 일곱 명의 각기 다른 진술 그 자체만으로 이루어졌다. 제1장부터 제4장까지 시체를 최초로 발견한 나무꾼, 생전에 피해자를 봤다는 행려승, 살인 혐의자를 붙잡은 나졸, 무사의 장모인 노파의 진술에 의해 대략적인 전후 상황과 피해자의 신원 등을 알 수 있다. 즉, 무사는 죽었고 함께 있던 무사의 아내는 죽지 않았으며 무사를 죽인 자는 다조마루라는 자라는 정도의 정보만이 주어진다. 그러나 핵심 정보는 다조마루의 진술부터 무사의 아내 그리고 혼령의 진술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제5장부터 혐의자인 다조마루가 자백을 한 후에도 무사의 아내의 진술과 무당의 입을 빌린 혼령의 이야기가 차례로 진행되면서, 서로가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고 만다.
3) 영화 <라쇼몽>의 줄거리
영화는 헤이안 시대 나생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처마 밑에서 시작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스님과 나무꾼 그리고 행인은 비를 피하기 위해 나생문에 모이게 된다. 그곳에서 스님과 나무꾼은 며칠 전 관아에서 자신들이 들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숲 속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나무꾼과 다조마루라는 이름의 도적 그리고 죽은 무사의 아내와 무당의 입을 빌린 무사의 혼령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진술하게 된다.
아내를 말에 태운 채 숲 속을 지나가던 무사가 도적 다조마루의 눈에 띈다. 그들을 본 도적은 속임수를 동원해 무사를 결박해 놓고 그의 아내를 강간한다. 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무사는 죽음에 이른다. 관아에 붙잡혀 온 도적은 멋진 결투 끝에 자신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음을 주장한다. 한편 산 아래쪽 절에 피신해 있던 무사의 부인은 관아에 소환되어 무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이라고 진술한다. 겁탈을 당한 후 무사의 눈에 담긴 경멸의 표정이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고, 혼절한 다음 깨어보니 무사의 몸에 자신이 들고 있던 비수가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진술로 인해 무당을 동원하여 무사의 혼령을 불러낸 다음 그의 진술을 유도해 낸다. 놀랍게도 혼령은 스스로 자결했음을 주장한다.[6]
이후 나생문으로 돌아와 사건에 휘말려 들기 싫었다는 이유로 자신은 나무를 하러 숲에 들어갔다가 무사의 시신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위증했던 나무꾼은 위의 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 또 다른 사건의 경위를 설명한다. 강간 직후 도적은 여인에게 무엇이든 할 터이니 자신과 함께 살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의 말을 선뜻 받아 들이지도 그렇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선택할 권리가 없다’며 남자들에게 선택권을 돌려 버릴 뿐이다. 그러나 도덕과 사무라이는 한 여인을 두고 치열한 결투를 벌이지 않는다. 무사는 아내가 두 남자를 받아들였으니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적은 허탈감에 여자를 버리고 홀로 떠나려 한다. 위기의 여인은 자신을 버리려 하는 남편과 도적을 조롱하면서 그들의 비열함을 꼬집는다. 무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지켜내야 하는 의무도 다하지 못한 무능한 인간이며, 반면에 도적은 높은 악명과 달리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여인의 비웃음으로 인해 칼을 뽑았고, 나약한 두 인간의 결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힘없이 칼을 휘두르다 운 좋게 도적의 승리로 결판이 난 것이다. 그러나 나무꾼이 상아로 장식된 값비싼 물건으로 묘사되는 단도의 행방에 연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로 인해 그 나무꾼의 진술 역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이후 나무꾼은 이에 대한 반성으로 나생문에서 주운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다.[7]
(3)소설의 영화적 변용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 <라쇼몽>에서 소설 『나생문』을 현재로 그리고 『덤불 속』을 과거로 교직 시키고 있는데, 제목과 공간의 상징적 분위기는 『나생문』에서, 그리고 미스터리한 사건은 『덤불 속』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화 <라쇼몽>에서 사건의 핵심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덤불 속’에서 무사의 아내가 도적 다조마루에게 강간을 당했고 무사는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영화적으로 재구성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묘사된 것처럼 지붕이 절반쯤 무너지고 황폐화된 나생문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시대상의 피폐함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문과 더불어 소나기가 몰아치는 괴기스런 분위기와 나무꾼의 독백,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등장한 행인은 관객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침통해하고 있는 나무꾼과 행려승을 다그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살인사건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진술이 시작된다. 그래서 나무꾼과 행려승이 ‘덤불 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그들이 재판정에서 보고 들었던 도적 다조마루의 증언, 무사의 아내의 증언 그리고 무당의 입을 빌린 죽은 무사의 이야기를 행인에게 이야기하게 되고, 이를 다 들은 나무꾼은 그들에게 자신이 그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그들이 들려준 세 이야기를 모두 부정한다.
소설 『덤불 속』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소급 제시의 형식으로 7번 반복 서술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에서의 시간 구조는 과거와 현재라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에 비해, 영화로 각색되면서 빗속의 세 남자 즉, 나무꾼, 행려승 그리고 행인이 사건 당사자들의 증언을 들었거나 직접 목격한 사실을 서로 이야기하는 구도를 추가한데다 스크린 위에서 재현되는 영상의 현재성으로 인해 영화는 현재, 과거 그리고 대과거의 삼중 시간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이처럼 세 가지 시간적 차원의 시각적 표현과 더불어, 서사 구조를 소설보다 더 단순화시켜, 나생문 처마 밑에서 나무꾼과 행려승이 세 명의 사건 당사자가 재판정에서 진술하는 것을 보고 들은 바를 행인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은 플래시백 속의 플래시백으로, 그리고 이들의 진술은 모두 거짓이라 부정하며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고 나무꾼이 행려승과 행인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은 플래시백으로 묘사함으로써, 네 개의 시점에서 동일한 하나의 사건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실을 제외하고는 스토리의 변형에서의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 『덤불 속』과 마찬가지로 영화 <라쇼몽>에서도 서사를 끌고 가는 주요 극적 모티브는 ‘살인범은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범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티브는 어디까지나 주제를 이끌어내기 위한 영화적인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네 개의 다른 관점에서 반복되는 동일한 이야기의 귀결점은 결국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결국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 남는다. 이처럼 감독은 영화 속에서의 진실을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허무주의로 끝맺고 있다.
그렇지만 감독은 영화의 주제를 구현함에 있어 원작 소설에서의 인물의 삭제와 추가를 시도한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인물은 바로 나무꾼이다. 나무꾼은 원작 소설에서는 단지 시체를 맨 처음 발견하는 역할에 머물렀지만, 영화에서는 살인사건을 발견하는 또 한 사람의 목격자로 강화되어 있다.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 나무꾼은 관객을 작품 전체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나무꾼은 소설과는 달리 사건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추가하여, 다조마루, 무사의 아내, 살해된 남편의 진술은 모두 거짓이며, 그들은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이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겁에 질려 결투를 하는 것을 목격했고, 결국 도적이 이겨 무사를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러자 행인은 나무꾼의 이야기도 거짓말이라고 비웃는다. 행인의 주장에 따르면 나무꾼은 단도를 훔쳤기 때문이다. 또한 행인은 소설 『나생문』에서는 노파의 옷을 빼앗음으로써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하인이었으나, 영화에서는 오프닝에서 행려승과 나무꾼을 추궁해 1차 서술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엔딩 부분에서는 아기의 옷을 빼앗아 달아나는 인물로 변형되었다.
나무꾼 이외에, 주제의 변화와 관련 지어 살펴봐야하는 인물은 바로 아기이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아기는 『덤불 속』에서 딸의 정숙함을 증언하는 소극적 역할에 머물렀던 노파를 없애는 대신 감독이 영화에서 새롭게 창조한 인물이다. 상황과 사건만을 제시해 놓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 버린 원작 소설과는 달리, 감독은 엔딩에서 나무꾼에게 아기를 안고 가게 함으로써 원작과 시나리오의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주제가 다소 변화를 겪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소.”라는 행려승의 대사가 두 원작 소설에서 표현된 아쿠타가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대사라면, “덕분에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소.”라는 행려승의 말은 앞의 대사와 대응을 이루면서 구로사와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구로사와는 두 원작 소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넘어서서, 각색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휴머니즘을 제시하기 위해 아기를 창작해 낸 것이다.[8]
(4)선과 악 그리고 에고이즘
1) 에고이즘의 정의와 분류
에고이즘은 라틴어로 ‘나’라는 뜻의 에고(ego)에서 유래된 말이다. 에고이즘은 국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이기주의로 정의 내린다. 에고이즘은 선(善)이 자기 이익의 추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윤리이론이다. 이 말은 때로는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을 뜻하는 자기중심주의(egotism)라는 말로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에고이즘의 학설은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문제보다는 개인 및 개인의 관심에 대한 상식적인 생각과 더 관련이 있다. 또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복지와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완성을 추구한다고 본다.
에고이즘을 분류를 해보면, 크게 모든 인간은 본래 에고이즘적인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 심리적 에고이즘과 인간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가정했을 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 윤리적 에고이즘이 있다. 심리적 에고이즘은 모든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하지만, 윤리적 에고이즘은 모든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한다. 즉, 심리적 에고이즘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실상 자기 이익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며,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윤리적 에고이즘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 이익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행위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따라야 할 사회적, 도덕적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9]
2) 에고이즘을 통한 인간상 분석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인간의 내면을 깊은 통찰력으로 꿰뚫어 선의 얼굴 이면에 감춰진 위선을 작품을 통해 묘사하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즉, 그는 선의 얼굴로 가장을 하고 자신의 내면을 숨긴 채 타인을 상대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위선을 인식했을 것이다. 때문에 작품을 통해 이러한 구제하기 힘든 위선적 인간상을 나타내려 했다고 판단된다.
소설 『나생문』 에 나타난 노파의 행동을 살펴보면, 노파는 우선 “송장의 머리털을 뽑는다고 하는 짓은 다소 나쁜 짓인지도 모르지”라고 말해 자신의 악행을 인정한다. 다음에 다시 자신이 했던 말을 뒤집어서 “여기에 있는 시체들은 모두 그만한 일을 당해도 싼 인간들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것은 살아 있을 때 나쁜 일을 일삼았으니, 그 대가를 받아도 응당하다는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더불어 노파는 죽은 여자의 머리를 뽑는 행동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므로, 이는 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파의 말을 종합하면 죽은 여자가 했던 일, 뱀을 네 치 정도 잘라서 말린 것을 마른 생선이라고 속여 팔았던 일은 악행이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때문에 했던 일이므로 또 악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악이면서 악이 될 수 없다는 노파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혼자만의 생각이고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서 이는 어떤 객관성을 띤 논리나 정당성에 근거한 것은 아닌 것이다.
노파는 자신의 궤변에 속아 넘어가 자신을 살려 주기를 기대한 예상과는 달리 하인이 노파의 옷을 빼앗자 놀라게 된다. 이처럼 삶에 집착이 강한 노파는 하인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옷을 벗기는 강탈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만큼은 용서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노파는 죽은 여자의 행위를 변호하면서 현재 자신이 처한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죽은 여자의 행위를 변호하는 구실을 삼아 선의 얼굴로 가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노파의 일관성이 없는 궤변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변명이고 위장된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다. 위와 같이 일관성이 없는 노파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위선적인 인간상을 나타내려 했다.[10]
영화 <라쇼몽>에서 소설 『덤불 속』과 상이한 구성은 나무꾼의 진술이다. 소설에서 나무꾼의 역할은 초기 도입부에서 무사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현재시점인 나생문에서의 대화 속에서 나무꾼은 살인사건의 전말을 모두 지켜본 작중관찰자시점으로 관객들에게 살인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구로사와 감독은 나무꾼을 통해 영화 속 살인용의자인 무사나 무사의 아내 또는 다조마루 등은 에고이즘과 자기합리화의 속성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당당한 살인 당사자들의 진술과는 정반대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어 인간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자기합리화의 에고이즘을 드러내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대한 동물적 본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 신뢰의 문제에 있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여실히 표출함과 동시에 아기를 매개체로 인간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주어 관객에게 휴머니즘에 대한 고찰을 요구하고 있다.
구로사와 감독의 인간에 대한 희망은 나무꾼을 통해 잘 나타난다. 감독은 나무꾼 또한 다른 인물과 다를 바 없는 에고이즘과 자기합리화의 속성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나무꾼이 살인사건의 전말을 다 보았음에도 살인현장에 있는 무사 아내의 단도가 탐이나 감춘 다음 재판정에서는 ‘자신은 살인자가 누구인지 모르며 자신이 본 것은 살인 후인 무사의 시체일 뿐이라고 위증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영화는 이렇게 욕심 많은 인간을 통해 자신이 재해석한 살인사건의 전말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나무꾼이 다른 살인 용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에고이즘과 자기합리화의 속성에 똑같이 휩싸여 있는 사람이라면 나무꾼의 진술에 신빙성이 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더욱 어려워 지고 살인용의자 세 사람의 에고이즘과 거짓말을 폭로하여 사건의 진상은 더욱 추악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구로사와 감독은 영화의 등장인물의 대부분을 신뢰할 수 없으며 에고이즘과 자기합리화에 빠져버린 추악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도 선한 인간성에 대한 호소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생문에 비로소 비가 그치고 환한 햇살이 비춘다. 이 햇살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거짓과 추악한 에고이즘을 버리고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희생정신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윤리문제를 선과 악이라는 문제에 보다 충실한 관점에서 풀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11]
3. 결언
(1)인상 깊은 구절 또는 장면
1) 소설 『나생문(羅生門)』
하긴, 죽은 놈 머리털을 뽑는 건 누가 봐도 몹쓸 짓을 게야. 그래도 여기 있는 건 전부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인간들 송장뿐이라구. 방금 내가 머리털을 뽑은 년만 해도 뱀을 네 치만큼 씩 잘라 말린 걸 건어물이랍시고 칼 찬 무사님들한테 팔고 다녔지. 돌림병에 걸려 뒈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러고 다닐 걸? 그것도 말이야, 이념이 파는 걸 맛있다며 무사님들이 죄다 반찬으로 사 갔다잖우. 나는 이 년이 한 짓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 그랬으면 굶어 죽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게야. 그러면 또 지금 내가 하던 짓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어차피 굶어 죽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게지. 이 년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 아마 내가 하는 짓도 너그럽게 봐줄 거라구.[12]
노파는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는 척하나 사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인간들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모순적인 논리를 펼친다. 자신이 머리털을 뽑고 있던 여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므로 사기치는 것은 악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진정으로 여성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을 뽑고 다그치는 하인에게서 일신의 안녕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 속에서 되는대로 아무런 변명을 지껄일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노파의 일관성 없는 논리는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지 어떤 객관성을 띤 논리나 정당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노파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인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와 갑자기 오른손을 종기에서 떼고 노파의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 달려들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강도짓을 해도 원망하진 않겠지.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며 굶어 죽을 몸이거든.” 하인은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겨냈다. 그리고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려 드는 노파를 거칠게 걷어차 시체 위로 쓰러뜨렸다.[13]
노파는 살기위해 했던 변명의 결과가 자신의 옷을 강탈당하는 것으로 드러나자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파가 앞서 자신이 별친 논의에 따르면 하인의 돌발행동에 대해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달리는 노파의 모습에서 위선적인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은 절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2) 소설 『덤불 속(藪の中)』
나는 그 계집하고 눈이 마주쳤을 때, 설령 벼락을 맞아 죽더라도 이 년을 마누라 삼고 싶다고 생각했어. 마누라 삼고 싶다-그때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단지 그거 한 가지뿐이야. 그건 당신네들 생각처럼 천한 색욕이 아니야. (중략) 그렇지만 사내를 죽이더라도 비겁한 방법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 나는 사내를 묶은 밧줄을 풀고 칼로 하자고 했지. (중략) 내 칼은 스물 세 합 째에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수다. 스물 세 합 째에-아무쪼록 그건 잊지 마쇼. 난 지금도 그것만은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이 몸하고 스무 합이나 칼을 맞댄 자는 천하에 그 사내 하나뿐이야.[14]
다조마루는 어차피 자신이 죽을 목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버리고 도적의 명예를 택한다. 그에게 있어 살인과 강간이라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오로지 비겁하지 않고 당당한 인물이라는 점만이 중요하다. 다조마루가 지키고자 한 명예란 비겁하게 사람을 해치지 않는 명예일 것이다. 즉 다조마루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는 반성하면 되지만 수치스러운 것은 목숨과도 바꿀 만큼의 가치가 있을 정도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15]
“그럼 목숨을 내어 주세요. 저도 곧 뒤따르겠습니다.”남편은 이 말을 듣자,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물론 입 안에 대나무 낙엽이 가득 들어 있어서 목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보고 금세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남편은 저를 경멸하면서 “죽여라”하고 그 한 마디 말을 한 것입니다. 저는 거의 비몽사몽간에 남편의 연 푸른색 나들이옷 가슴팍에 푸욱 단도를 찔러 넣었습니다.[16]
무사의 아내는 목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챘다는 것은 남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남편의 마음을 읽기 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절을 빼앗기고 도둑에게 마음까지 빼앗긴 부정한 여자라는 수치를 피하고 정절을 지킨 여자라는 명예를 지키고 싶었기에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거짓을 말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에고이즘과 자기합리화 하는 무사의 아내의 모습에서 인간의 추악한 단편을 볼 수 있다.
3) 영화 <라쇼몽>
S. 라쇼몽 · 석양 무렵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낙수. 갓난아기를 안고서 멍하니 서 있는 행려승과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무꾼. 아기가 또 다시 보채기 시작한다. 나무꾼, 고개를 든다. 나무꾼, 가만히 행려승의 손 안에서 보채고 있는 아기를 쳐다본다. 그리고 뭔가 망설이고 있다가 이윽고 행려승에게 다가가 아기에게 손을 댄다.
행려승: (무섭다는 듯 아기를 끌어안고서 뒤로 물러나며) 뭐야! 이 핏덩일 어찌하려고? (아기가 심하게 울어댄다.)
나무꾼: (행려승을 서글픈 듯 바라보며) 집에 돌아가면 아이가 여섯이나 있소. 하지만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힘들긴 마찬가지요.
행려승: (깜짝 놀라 나무꾼의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부끄러운 말을 했군요.
나무꾼: (행려승을 쳐다보며) 이해하오. 날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고개를 약간 떨구며) 부끄러운 건 바로 나요. 나도 내 맘을 모르겠소.
행려승: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아니오, 이건 고마운 일이오. 덕분에 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소.
나무꾼: (환한 표정으로 행려승을 쳐다보며) 당치도 않소.
나무꾼, 행려승으로부터 아기를 받아 안고 낙수 속을 빠져나간다. 떨어지는 낙수에 가느다란 햇살이 비춰지고 있다. 라쇼몽 전경. 배웅하는 행려승. 아기를 꼬옥 안고 떠나는 나무꾼에게 석양빛이 비춰진다.[17]
위의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원작에 없는 아기의 등장은 원작과 영화의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행려승은 이 장면을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되찾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나무꾼이 위증했다는 사실에 나무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무꾼이 아기에 손을 대려 하자 버럭 화를 낸다. 그러나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은 흔들렸지만, 아직 인간을 믿을 수 있는 희망은 남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행려승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기를 나무꾼에게 순순히 넘기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되었든 나무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고한 자로서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아이를 여섯이나 키우는 그가 주운 아이를 제대로 키울리 만무하다. 행려승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이유로 아이를 떠넘기는 것은 그저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 그리고 아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또한 선의 얼굴로 가장한 에고이즘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2)감상평
소설 『나생문』과 『덤불 속』은 물리적으로는 매우 짧았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심오했다. 특히 두 소설이 변용된 영화 <라쇼몽>은 보는 내내 그 구성에 대해 감탄했다.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자신의 이익에 알맞게 변형하는 추악한 모습을 꼬집었고, 그 추악함은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에서도 에고이즘을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 늦은 저녁에 귀가했을 때이다. 친구와 함께 자취 중이라서 집에 도착하면 열쇠로 문을 열기보다는 집 안에 친구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요청한다. 그러한 요청은 항상 문을 노크하고 문 손잡이를 강하게 흔드는 것으로 대신해왔다. 그날도 으레 그러한 의식을 치뤘고, 평소와 달리 의식의 결말이 좋지 않았다. 내 손아귀에는 문에서 떨어져 나온 문고리가 있었다. 다행히도 집 안에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고치려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친구는 문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문을 열었는데 그냥 문고리가 빠졌다고 말했다. 단순한 게 최고라는 생각에 전후 사정을 편집한 내 말에 친구는 ‘너 또 문 흔들었지’라며 귀신같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챘다. 이 순간 나 또한 내 이익을 위해 과거의 기억을 조작하는 추악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에고이즘적 사고는 비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회에 만연한 것이다. 특히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거나 또는 잡지 못하고 있는 가에 따라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이 돌변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인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유사한 사건에 대해서라도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관성이 없는 면모에 대해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에고이즘적 판단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손해보는 상황이나 이익을 보기 힘든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조작하거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요약서를 끝까지 읽어 주신 감사한 분께 간곡히 부탁컨데, 영화 <라쇼몽>을 미리 시청하실 것을 권장하고 싶습니다.
4. 참고문헌
芥川龍之介, 『羅生門』, 김동근, 소와다리, 2015년
장경렬, 「지각의 인식론적 경계 위에서 - 아쿠타가와 및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라쇼몽’이 의미하는 것」, 『일본비평』, 4호, 2011년 2월
강혜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羅生門)』과 『야부노나카(藪の中)』 속에 나타난 인간관」, 『日語日文學硏究』, 64호, 2008년
신윤주, 「에고이즘을 통한 인간상 고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생문(羅生門) 과 나쓰메 소세키 마음(こころ)을 중심으로」, 『日本近代學硏究』, 13호, 2006년
안영순, 「아쿠타가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의 영화적 변용: <라쇼몽>과 <빨간 모자의 진실>을 중심으로」, 『Foreign Literature Studies』, 30호, 2008년 5월
우주연, 「‘라쇼몽’으로 역사의 의미를 읽는다」, 『중앙사론』, 19호, 2004년 6월
조경숙,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시대의식, 그 원체험에 관한 일고찰」, 『日語日文學硏究』, 75호, 2009년,
[1] 芥川龍之介, 『羅生門』, 김동근, 소와다리(2015), 8쪽 인용
[2] 안영순, 「아쿠타가와의 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의 영화적 변용: <라쇼몽>과 <빨간 모자의 진실>을 중심으로」, 『Foreign Literature Studies』, 30호, 2008년 5월, 91쪽~101쪽 참조
[3] 조경숙,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시대의식, 그 원체험에 관한 일고찰」, 『日語日文學硏究』, 75호, 2009년, 379쪽~390쪽 참조
[4] 신윤주, 「에고이즘을 통한 인간상 고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생문(羅生門) 과 나쓰메 소세키 마음(こころ) 을 중심으로」, 『日本近代學硏究』, 13호, 2006년, 69쪽~70쪽 참조
[5] 안영순, 앞의 책, 94쪽 참조
[6] 장경렬, 「지각의 인식론적 경계 위에서 - 아쿠타가와 및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라쇼몽’이 의미하는 것」, 『일본비평』, 4호, 2011년 2월, 217쪽~218쪽 참조
[7] 우주연, 「‘라쇼몽’으로 역사의 의미를 읽는다」, 『중앙사론』, 19호, 2004년 6월, 147쪽~151쪽 참조
[8] 안영순, 앞의 책, 97쪽~103쪽 참조
[9] 신윤주, 앞의 책, 72쪽~73쪽 참조
[10] 신윤주, 앞의 책, 74쪽~75쪽 참조
[11] 강혜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羅生門)』과 『야부노나카(藪の中)』 속에 나타난 인간관」, 『日語日文學硏究』, 64호, 2008년, 11쪽~15쪽 참조
[12] 芥川龍之介, 앞의 책, 28쪽 인용
[13] 芥川龍之介, 앞의 책, 29쪽~30쪽 인용
[14] 芥川龍之介, 앞의 책, 190쪽~191쪽 인용
[15] 강혜선, 앞의 책, 8쪽~9쪽 참조
[16] 芥川龍之介, 앞의 책, 194쪽~195쪽 인용
[17] 안영순, 앞의 책, 102쪽~103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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