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하는 돈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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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1. 29.

    by. chocolatebox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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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민중사』를 통해 보는 사회변동과 역사의식

       

      -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유강은 옮김, 이후, 2006년 -
       

       

      1. 정복과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다

      (1) 콜럼버스, 인디언, 인간의 진보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왕과 여왕에게 원정 지원을 요청했다. 스페인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황금을 원했다. 인도에는 황금이 있었으나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육로는 매우 위험하기에, 유럽 국가들은 인도 제국에 갈 수 있는 항로를 원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황금과 향신료를 가지고 돌아올 경우, 그에게 이익의 10%를 주기로 하고, 또한 신대륙의 총독과 대양의 제독의 칭호를 부여하기로 했다. 콜럼버스 또한 당대의 지식인들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하더라도 동쪽 땅에 다다를 수 있음을 확신했다. 항해한지 불과 33일만에 카리브해의 바하마 제도에 도착했다.

      바하마 제도에 살고 있던 아라와크족은 환대와 공유를 신조로 삼고 있었다. 콜럼버스를 맞이한 그들은 농경생활을 하며 살았고, 농경에 필요한 가축은 물론 철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황금 귀고리를 하고 있었고, 불행히도 서유럽 문명에서 아메리카로 온 최초의 메신저였던 콜럼버스는 부(富)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그는 바하마 제도에 도착하자마자 정보를 얻기 위해 아라와크 족을 납치했다. 콜럼버스가 원했던 정보는 ‘황금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콜럼버스는 두 번째 원정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황금과 노예들을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황금을 찾아 아이티에 왔지만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배에 황금을 대신하여 500명의 노예를 채웠다. 그 가운데 200명은 항해 중에 죽었고, 나머지 인디언들은 한 지역 교회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그러나 그는 배를 황금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황금 매장 예상지인 아이티의 한 지역에서,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황금을 바치지 못한 인디언들의 손을 잘랐다. 불과 한 세기가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아라와크족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인디언의 역사』라는 책에서 당시 스페인들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밝혔다. 그는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생활의 첫출발을 정복과 노예와 죽음의 역사로 기록했다. 반면에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콜럼버스 부류의 사람들을 위대한 항해가이자 발견자로 그리는 반면, 그들이 행했던 학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작가인 하워드진에 따르면 역사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방법 중 하나로 과거의 숨겨진 단면들, 사람들이 권력층에 저항하거나 함께 단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순간들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 이주자들도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에 도착했을 때, 인디언들에게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은 당시 포와탄이라는 인디언 추장의 통치 지역이었다. 포와탄은 통치 지역에 영국인이 정착했다는 것을 알고 공격하는 대신에 대화를 시도했다. 인디언을 노예로 만들지도 못하고 같이 공존할 수도 없었던 영국인들은 인디언과 그의 마을을 파괴하기로 했다. 영국인들은 적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을 공격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는 7,500만 명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수백 가지의 다양한 부족 문화와 약 2,0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야생의 세계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인디언들은 고유의 역사와 법률, 문학이 있었다. 과연 ‘진보’라는 말에는 그들의 사회를 파멸시켜도 될 명분이 충분한 것일까?

       

      (2) 피부색에 따른 차별

      버지니아에서는 1609~1610년 사이에 있었던 ‘기아의 시간’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새로 도착한 이주자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경작할 노동력이 부족했지만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를 원했다. 버지니아의 정착민들은 담배 재배법을 배워 1617년에는 처음으로 영국 본토에 담배를 수송하기도 했다.

      버지니아 정착민들은 콜럼버스처럼 인디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킬 수 없었다. 인디언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우월한 무기로 인디언을 대량학살을 한다해도 보복당할 우려가 있었다. 정착민들은 인디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을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이 백인들보다 스스로 잘 보살핀다는 사실에 질투심까지 느꼈다.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정착민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질투와 분노의 감정들이 정착민들로 하여금 노예의 주인이 되게 했다. 당시 수입된 흑인들을 노예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콜럼버스보다 50년 앞서 포르투갈인들은 흑인을 리스본에서 파는 것으로 노예무역의 시작을 알렸다. 노예로 취급되는 데에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의 무기력함도 일조했다. 인디언들은 그곳이 자신들의 터전이었다. 백인들은 낯선 신대륙에 자신들의 문화도 가지고 왔다. 그러나 흑인들은 고향땅뿐만 아니라 문화 마저도 잃고 말았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점점 사라져가는 상황에 직면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아메리카의 노예제는 역사상 가장 잔혹했다. 첫째, 아메리카 노예들은 끝없는 이익 추구의 광기에 의해 혹사되었다. 둘째, 인종적인 혐오감을 바탕으로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는 시각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메리카 노예들은 인간 이하로 취급당했다. 1800년 무렵까지 1,000만~1,500만의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끌려왔다. 전부 합하면 이른바 근대 문명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한 세기 동안 아프리카는 거의 5,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죽음과 노예제에 의해 잃었을 것이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노예제는 제임스타운 정착민들의 노동력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인디언을 부리는 것은 불가능했고, 백인을 고용한다는 것 또한 어려웠다. 그러나 흑인들은 인신매매로 돈벌이를 하는 상인들 덕분에 그 숫자가 점점 증가했다. 또한 납치된 후 흑인들이 겪었던 끔찍한 대우는 그들 대부분을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흑인들의 노예화가 이루어졌다.

      정착민들은 백인 하인과 흑인 노예를 구분 지으려 했다. 흑인들에 대해서 우월감이 있던 백인들은 경멸의 시선으로 흑인들을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 대할 때보다 더욱 거칠고 억압적으로 대했다. 이것이 과연 백인이 흑인에 대해 갖는 자연스러운 반감의 결과였을까? 인종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상황이 낳은 결과이고, 따라서 사회는 그런 상황을 제거해야만 한다.

      흑인들은 노예가 되는 것에 저항하며 최소한 자기 자신과 동족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증명하려 햇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확연히 표출되지 않아 처벌하기 힘든 저항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일부러 느릿느릿 일하거나 백인들의 재산을 몰래 파괴했다. 저항의 또 다른 방법은 탈출이었다. 노예들은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으며 탈출할 공리를 하다가 발각되기만 해도 끔찍한 처벌을 받았다.

      백인 정착민들은 조직화된 흑인 봉기를 두려워했다. 횟수가 잦았던 것은 아니지만 농장주들이 두려움을 갖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흑인들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은 백인들이 흑인들과 규합하여 사회질서를 혼란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아직 인종차별이 정착되기 전에는 몇몇 백인 하인들과 흑인 노예들 두 집단이 힘을 합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가난한 백인들에게 새로운 권리와 이익을 주었다. 예를 들어 하인 계약 기간이 만료된 경우 돈과 곡식을 받는 법안이 있다. 이러한 조치로 하인계급에 속한 백인들은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덜 품게 되었으며, 흑인 노예들과 규합하여 백인 주인들에게 저항할 가능성도 낮아졌다.

      굶주린 정착민들의 절망적인 위기감, 고향을 잃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무기력함, 노예무역 상인들과 담배 재배자들에게 보장된 이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있는 법과 관습이 흑인들을 아메리카의 노예제의 그물로 옭아맸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지배자들은 백인들과 흑인들이 평등하게 함께 단결하지 못하게 차단하기 위해 가난한 백인들에게 신분상의 작인 이익과 혜택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물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역사적인 것이며 특수한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다.

       

      (3) 천하고 상스러운 신분의 사람

      버지니아가 건설된 지 70년 뒤인 1676년, 성난 정착민들은 수도 제임스타운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베이컨의 반란’이다. 이 반란은 아메리카 정착민들이 적으로 간주했던 두 집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결과였다. 하나는 인디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와 특권을 누리며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자들이었다.

      베이컨의 반란은 서부 변경의 개척지 문제에서 야기되었다. 1670년대 버지니아 동부에서는 대지주들이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람은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인디언과의 마찰로 인해 위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지배자들은 인디언과 대항할 의사가 없었다. 식민 정부에 실망하고 좌절한 변방의 개척자들은 분개했다.

      버지니아의 소시민들은 베이컨을 하원의원으로 선출하여 식민 정부에 참여시켰다. 그는 인디언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나 시민군을 조직하여 인디언들을 습격했다. 베이컨은 인민선언(Declaration of the People)에서 반란의 명분이 인디언들에 대한 개척자들의 증오와 대지주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임을 밝혔다. 그러나 베이컨이 병사함으로써 반란은 지속되지 못했고, 23명의 반란 지도자들은 교수형에 처했다.

      베이컨의 반란은 버지니아에서 나타났던 연속적인 억압의 연결고리 때문에 발생했다. 인디언들은 백인 개척자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했고, 개척자들은 제임스타운의 부유한 상류층들에게 세금을 바치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를 떠나 식민지의 모든 사람들은 영국에게 이용당했다. 식민지인들이 재배한 담배의 가격은 판매지인 영국에서 책정되었고, 영국 왕은 해마다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반란에 가담했던 하인들은 아주 가난한 백인들로 구성된 하층계급의 일부였다. 영국에서는 궁핍한 수많은 농부가 도시로 내몰린 상황에서 빈민들을 처벌하거나 구빈원에 수용시키거나 국외로 추방하여 아메리카로 이주하게 했다. 아메리카로 이주한 수많은 빈민들은 아메리카로 가는 항해비용을 5~7년 동안 주인에게 봉사하여 갚는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아메리카에 도착하자 계약 노동자들은 마치 노예처럼 매매되었다. 구타와 매질은 흔한 일이었고, 하녀들은 강간을 당했다.

      식민지 시대 동안 계급이 뚜렷이 구별되면서 빈부의 차이가 확연해졌다. 메사추세츠 식민지가 설립되던 1630년, “언제나 부자도 있고 빈자(貧者)도 있으며, 또한 일부는 권위가 높고 나머지는 천한 것은 복종해야 한다”라는 총독 존 윈스럽의 말에서 당시 식민지 지배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700년대 식민지는 급속히 성장했다. 1700~1760년 사이 인구가 25만에서 160만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농업, 어업, 상업을 비롯해 소규모 공장들도 발전했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찰스턴 같은 도시들은 두 세 배로 커졌다.

      식민지의 부유한 상층계급은 대저택에서 하인 또는 노예들을 거닐고 여행을 다녔다. 반면 빈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다. 식민지에 관한 전통적인 역사 서술은 식민지가 외부의 적 영국에 저항하여 단결했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식민지 내부에는 노예와 자유민, 하인과 주인, 소작인과 지주, 빈자와 부자간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713년 보스턴에는 심각한 식량 부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상인은 곡식을 외부 지역에 판매했다. 성난 군중은 그의 창고를 습격했고, 이를 저지하는 식민지 부총독을 저격했다.

      베이컨의 반란은 인디언들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변경에 사는 백인 개척자들의 분노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한편 인디언들과 전쟁을 벌일 경우 백인들의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인디언들을 대치시키면 권력자들은 빈부 격차로 인한 계급 갈등의 싹을 자를 수 있었다. 또한 백인 개척자 집단의 분노를 무릅쓰고 감소 추세에 있는 인디언을 회유하는 일은 매우 위험했다. 1750년대 캐롤라이나에는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보다 훨씬 많았다. 식민지 권력자들은 흑인과 인디언들이 서로 반목하도록 조장하여, 흑인과 인디언이 단합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흑인 노예와 가난한 백인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인종차별을 조장했다.

      식민지들이 성장할수록 지배계급은 통제할 수 있는 다룰 수단을 찾게 되었다. 큰 부자와 극빈층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백인 중간계급이 발전했다. 중간계급으로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이 상인 및 농장주들과 세력을 규합한다면 변방의 인디언, 흑인 노예, 가난한 백인에 대한 튼튼한 완충 지대가 될 수 있었다. 상층계급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의 손실 없이 중간계급의 충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대가를 주어야했다. 이러한 양보는 물질적 이익보다 강력한 것이어야만 했다. 다름 아닌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였고, 이를 통해 노예제나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않으면서 영국에 맞서 전쟁을 수행할 만큼 백인들을 결속시켰다.

       

      (4) 폭정은 폭정이다

      1776년 무렵 북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의 일부 중요 인사들은 나라를 세운 후 합중국(United States) 이라 칭한다면 대영제국을 위해 식민지를 관리해온 사람들에게서 토지와 이윤, 정치권력을 넘겨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점으로 미국 혁명을 바라볼 경우 그건 뛰어난 업적이며,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몇 세기에 걸쳐 받아왔던 경외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60년대에는 여러 곳의 식민지 정부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봉기가 18차례나 일어났다. 그리고 이른바 지역 엘리트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정치적·사회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지역 엘리트들은 점점 심해져가는 무질서에 동요했다. 그들은 식민지의 사회 질서가 붕괴될 경우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에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그것을 지키기 위한 보장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영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다.

      1763년 영국은 7년전쟁[1]에서 프랑스를 격퇴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식민지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전쟁 비용을 치르기 위한 세입이 필요했던 영국은 식민지로 충당하려 했다. 아울러 식민지 무역은 영국 경제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만지에서는 실업과 빈곤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었다. 가난으로 일부 식민지인들은 불안해했으며, 심지어 반란의 조짐마저 엿보였다. 1766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백인 농부들은 레귤레이터 운동을 일으켰다. 레귤레이터들은 자신을 가난한 소작농이거나 노동자라고 밝혔다. 그들은 부당하게 통치하고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관리들에 맞서 빈자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스턴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1765년 영국 정부는 인지 세법을 통과시키는데, 그 법은 7년전쟁의 비용을 식민지인들에게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발한 군중은 한 부유한 상인과 토머스 허친슨의 집을 부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폭동은 지역 엘리트들에게는 근심거리였다. 빈민들의 계급적인 증오심이 단지 영국에 협력하는 부자들에게만 향하기를 바랐고, 자신들에게까지 향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보스턴의 상인, 선주(船主), 마스터들은 로열 나인이라는 정치적인 단체를 조직하고 인지세법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를 준비했다. 흑인들은 제외되었지만, 2,000~3,000명의 사람이 지역 관리의 집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시위를 조직한 신사들이 자리를 뜨자 군중은 침입하여 관리의 재산들을 파괴했다. 지역 엘리트들은 폭력사태를 비난하면서 폭도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가 또다시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지역 엘리트들은 다시 시위를 선동했다. 이번에 새뮤얼 애덤스 같은 지역 엘리트들은 어떤 폭도, 혼란, 소요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1768년 이후 2,000명의 영국 군대가 보스턴에 주둔했고, 일거리가 부족해지자 병사들은 노동자들의 일까지 하기 시작했다. 1770년 3월 5일, 영국군 병사들이 일자리를 빼앗아간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갈등이 유혈사태로 번졌다. 군중들이 세관 앞에 모여 병사들을 자극하자 병사들이 발포해 몇 명의 군중이 죽은 ‘보스턴 학살’이 발생했다. 영국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영국 병사를 추방하고 군대를 도시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보스턴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보스턴의 정치사회 지도자들은 영국의 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보스턴교신위원회(Boston Committee of Correspondence)를 결성했다. 그들이 취한 행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1773년에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차(茶)에 부과된 세금 징수에 반발하여 한 무리의 식민지인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를 습격해 차 상자를 바닷물에 버렸던 것이다.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더욱 엄격한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보스턴 항을 폐쇄했으며, 식민 정부를 해체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버지니아의 엘리트들은 하층계급의 분노를 영국 쪽으로 돌리기를 바랐다. 그들은 버지니아의 식민지인들에게 왜 영국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지 설득했다. 동시에 식민지인들 사이에서 계급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만큼 모호하고,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을 위한 애국심을 구축할 만큼 고무적인 설득을 했다. 또한 1776년에 토머스 페인이 출판한 『상식』 또한 저항의식을 독립에 대한 의지로 연결시키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페인은 식민지들이 영국의 통제로부터 반드시 자유로워져야 하며, 식민지인들이 영국과 단절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엘리트 식민지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애국적인 주장에는 동의했지만, 민주주의로 진전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의 관점에서 일반대중은 경솔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의 가혹한 통제는 식민지인들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1774년 식민지인들은 대륙회의를 발족했다. 대륙회의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토머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2일에 대륙회의에서 채택되어 7월 4일에 공포됐다. 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서는 모든 식민지의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보인다. 이어서 독립선언서는 영국 왕의 부당한 행위들을 고발한다. 또한 민중이 정부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공유하기에 알맞아 함께 영국과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에는 인디언, 흑인 노예, 여성은 제외됐다. 오히려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기 20년 전 매사추세츠에서는 인디언들을 ‘반란자이자 적, 반역자’라고 매도하면서 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오면 상금을 주기까지 했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제도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하려한 것이 확인되나, 식민지의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제 폐지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대륙회의 측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그러한 부분을 삭제했다. 또한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All men)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을 쓴 것은 여성을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여성은 정치적인 권리가 없었기에 평등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독립선언서를 연구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 독립선언서가 서로 무시하던 여러 집단을 함께 행동하게 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오늘날에도 그 영감 어린 말들은 많은 사람의 지지가 필요할 때 여전히 자주 사용되고 있다. 독립선언서의 진실은 식민지의 신흥 세력들에게 영국을 격퇴하기 위한 지지가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재산과 권력에 관한 기존의 체제가 심하게 붕괴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상 독립을 이룬 사람들이 기존의 체제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놈이 하든 폭정은 폭정일 뿐인 것이다.

       

      (5) 일종의 혁명

      보스턴 할살에서 총격을 가한 영국 병사들을 변호했던 매사추세츠의 변호사 존 애덤스는 식민지의 3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혁명을 지지했다고 추산했다. 근대 역사가 존 샤이는 당시 전체 인구의 5분의 1만이 실제로 영국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빈민들로 이루어진 군중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지만,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혁명 지도자들은 군대를 가난한 사람들이 계급 상승을 쟁취하고 사회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벙커힐, 브루클린 고지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에서 패했으나 트렌턴과 프린스턴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1777년 뉴욕의 새러토가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도 승리했다. 조지 워싱턴 부대가 추위와 싸우며 밸리 포지에서 적과 대치하는 동안, 벤저민 프랭클린은 7년 전쟁에서 패한 후 영국에 복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프랑스와 동맹을 협상했다. 남부로 옮겨간 전쟁에서 영국은 연저연승을 거뒀지만, 프랑스군의 도착으로 프랑스 함대가 해상을 봉쇟여 영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해 최후의 전투에서는 미국이 승전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도 부자들과 빈자들은 갈등을 빚었다. 또한 대륙회의에서는 전쟁에서 끝까지 싸운 장교에게 평생 동안 받은 급여의 반을 주겠다고 제안해 장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것은 아무런 급료도 받지 못하고 추위로 고통받으며 죽어간 일반 병사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1781년의 새해 첫날, 펜실베이니아의 일부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지휘관을 살해하고 대포를 앞세워 대륙회의를 향해 진군했다. 처음에 조지 워싱턴은 반란군과 화해하는 방법을 택했으나, 폭동이 지속되지 강경한 입장으로 변했다. 그는 두 명의 주동자들을 총살형에 처했는데, 그 집행자로 주동자의 동료를 지목했다. 워싱턴은 이 처형을 ‘본보기’라고 말했다.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남부 식민지들의 하층 계급 사람들은 혁명에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에서 승전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든 못 하든 엘리트 정치가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부의 워싱턴군 사령관 너새니얼 그린은 영국에 충성을 바친 국왕파들을 무자비하게 다룰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소작농들은 전쟁 기간 동안 위협적인 세력이 됐다. 소작농들은 대지주들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지대를 지불하고 있었으나, 혁명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지대 납부를 중단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왕파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일부 소작농에게 판매하였다. 새로운 자작농들은 소작인 노릇은 그만두게 됐지만 지주에게 지대를 바치는 대신에 이제는 은행에서 빌린 대부금을 갚아야 하는 저당권자가 되었다.

      국왕파들에게서 몰수한 대부분의 재산은 혁명 정부의 지도자들과 그 일단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되었다. 혁명은 식민지의 엘리트 집단에 국왕파가 소유하고 있던 권력과 부를 획득할 기회를 주었다. 또한 혁명 전쟁은 소지주들에게도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과 대부분의 소작농들에게는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변화가 없었다.

      7년 전쟁에서 북아메리카를 놓고 영국이 프랑스와 싸웠을 때, 인디언은 프랑스의 편에 서서 싸웠다. 무역만을 원했던 프랑스인들은 인디언 땅에 대한 점령자는 아니었던 데 반해, 영국인들은 정착을 위해 땅을 탐냈기 때문이다. 7년 전쟁이 종속하자 프랑스는 동맹자인 인디언을 무시하고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땅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인디언들은 그곳에 있는 영국군의 요새들을 공격했고, 영국군은 반격을 시도했다. 영국군은 인디언 부족에게 천연두를 퍼뜨릴 요량으로 병원에서 가져온 담요를 줬다. 그러나 영국군은 인디언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1763년에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경계선을 그어 인디언 영역을 선언하고 식민지인들의 진출을 제한했다. 이것 또한 식민지인들을 화나게 했다. 또한 이 사건은 인디언들이 혁명이 일어나자 오랜 적수였던 영국을 도와 싸웠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흑인 노예들도 혁명전쟁에서 싸웠다. 자유를 원하는 흑인들은 혁명군 편에서 싸우려고 했으나 조지 워싱턴이 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5,000명의 흑인이 혁명군에 가담했다. 수천 명의 흑인은 영국을 위해 싸웠다. 혁명은 일부 흑인들로 하여금 백인 사회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북부에 있는 주(州)에서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지만,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 1810년 북부에는 약 3만 명의 노예가 남아 있었다. 1840년이 되어도 여전히 1,000명의 노예가 남았다. 남부에서는 쌀과 면화를 재배하는 대농장들이 성장하면서 오히려 노예제가 더 확장되었다.

      혁명기 식민지에는 이미 인디언은 새로운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었으며, 흑인들은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또한 모든 것을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주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혁명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 탄생한 국가의 법으로 제정했다. 지도자들은 미국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로 이해하고 느꼈던 경제적 이해를 헌법에 반영했다.

      20세기 초 역사가 찰스 비어드는 헌법 작성을 위해 모였던 55인에 관해 연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이 부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 체제를 유지해줄 강력한 연방정부를 수립하는 데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칠스 비어드는 노예, 계약 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헌법 작성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힘없는 사람들의 요구 사항이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음을 밝혔다.

      매사추세츠는 투표할 수 있는 자격조건에서 재산의 수위를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충분한 재산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투표할 수 없게 되었다. 빚을 지고 살아가는 빈농들은 주의 법률가들이 자신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점에 분개했다. 이 후 법정은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가축을 압류하고 농토를 몰수하기로 하자 그들은 저항했다. 대규모의 무장 집단이 법정으로 행진했다. 매사추세츠 대법원에서 농민들의 반란 지도자들을 범죄자로 규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난한 일꾼 대니얼 셰이스는 700명의 무장 농민을 규합했다.

      농민들은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지만 겨울이 되면서 법원으로 행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수적으로 열세했던 반란 농민들은 결국 패주했고 대니얼 셰이스는 버몬트로 도주했다. 생포된 농민들은 법정에 세워져 열두 명이 사용을 언도받았다. 새뮤얼 애덤스는 “군주제의 경우에는 반역죄를 용서하거나 가볍게 처발할 수도 있지만 감히 공화국의 법률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런 봉기들이 건강한 정부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여겼다. 불행히도 새로 탄생한 국가의 정치경제적 지도자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반란들이 점차 증가하면 빈자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배분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이야말로 미국 헌법을 작성한 사람들의 본심이었다.

      국민이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하원의원의 선출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각 주는 재산 보유를 요건으로 투표 자격에 제한을 두었다. 여성, 인디언, 노예는 당연히 제외됐다. 그러나 혁명 후의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투표권에 대한 헌법상의 제한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헌법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가 부자와 빈자로 나뉘어졌다는 점이었다. 토지, 돈, 신문, 교회, 교육제도를 장악한 권력자들을 투표를 통해 저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각 주에서 새로운 국가의 법을 수용해야 하는 헌법 비준 시기가 됐다. 뉴욕에서는 헌법 비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헌법을 지지하는 연방주의자들은 사회가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영속적인 기구만이 민주주의의 경솔함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장점으로 13개 주를 아우르는 큰 국가는 사회적 무질서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헌법은 부유한 엘리트들의 이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자산가, 중간소득 숙련기능공 및 농민들의 지지도 얻어 낼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헌법은 연방의회에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고 알려진 수정 또는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더욱 만족스러운 것이 되었다. 권리장전은 새로운 정부를 민중들의 자유에 대한 보호자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히려 수정 조항 제1조는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수정 조항 제1조는 연방의회가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에 권리장전이 추가된 지 불과 7년인 1798년, 의회는 분명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 법은 선동금지법(Sedition Act)으로서 연방정부에 대한 “그릇되고 중상적이며 악의에 찬” 발언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선동금지법은 수정 조항 제1조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한 열 명이 이 법으로 수감되었다.

      연방의회는 전쟁채권 상환에 필요한 돈ㅇㄹ 조달하기 위해 조세법도 통과시켰다. 그 가운데 위스키세는 위스키를 만들어 팔던 소농들에게 손해를 끼쳤다. 1794년 위스키세 징수에 반대하는 농부들이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군대로 진압했다. 헌법 제정 초기에는 수정조항 제1조와 같은 일부는 무시되었다. 반면 조세권과 같은 것은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권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현명하고 공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균형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민의 절반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 보이지 않는 시민들은 초창기 미국의 여성들이었다.

       

      (6) 친밀하게 억압당한 사람들

      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들에게 법과 사회적 관습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남성은 여성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여성들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없도록 억압받고 있었다. 초기에 구성원이 모두 남자들로 이루어진 정착이에서는 여성은 성노예, 출산자, 반려자 등으로 수입됐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약 하인으로 왔으며 계약 기간이 완료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예와 별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들은 주인 부부에게 복종해야 했다. 흑인 여성들은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하며 이중고를 겪었다. 자유로운 백인 여성들도 힘겹기는 매한가지였다. 출산과 질병으로 인해 생존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영국에서 가져온 사고방식은 여성들에게 족쇄가 되었다. 여성이 결혼할 경우 남편이 그녀의 주인이 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죽이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가하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에게 체벌을 가할 수도 있으며, 아내의 재산과 소유물 또한 남편에게 귀속됐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강력한 교육이 있었음에도 일부 여성들은 자신들의 독립성을 증명할 방법을 모색했다.

      매사추세츠에 살았던 앤 허친슨은 자신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도 성격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목사에게 도전했다. 앤 허친슨은 매사추세츠 식민지에서의 추방령을 언도받았다. 그녀는 롱아일랜드 해안지역으로 갔는데, 그곳의 인디언들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여성들은 정치 같은 공적인 일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기간 동안에 여성들은 애국단체를 조직했고, 영국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777년 여성들은 독자적으로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국혁명과 남북전쟁 사이의 아메리카 사회는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변화해 여성의 상황에도 변화가 필연적이었다. 여성들이 신문 발행, 가죽공장 경영, 술집 경영, 숙련 작업 종사 등 중요한 일자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공업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여성들은 집에서 나와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결국 여성의 역할은 남편의 충실한 하인이었다.

      여성들은 공장에서 방적기를 다루는 일을 했고, 섬유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15~300세 사이의 여성들이었다. 1830년대 이들 직물 공장에서 최초의 산업쟁의가 벌어졌다. 그녀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섬유공장에서 파업을 했다. 여성의 권리가 제기된 것은 섬유공장뿐만이 아니었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위치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중간계급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초등학교 교사는 될 수 있었고, 차츰 여성들이 그 직업을 장악했다. 1780~1840년 사이에 읽고 쓸 줄 아는 여성들이 두 배로 증가했다.

      1821년 에마 월러드는 처음으로 여성 전용 학교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28년 후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또한 루시 스톤은 미국노예폐지협회의 연사로서 매사추세츠의 한 교회에서 여성의 권리에 관한 강연을 했다. 반노예제 운동가 안젤리나 그림체는 미국이 수백만의 남녀 노예를 해방시켜서 인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 수 있다면 수백만의 무릎 꿇은 여성들도 두 발로 당당히 사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여성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단체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노예제 반대 운동과 함께 여성들 자신의 평등을 위한 여성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1840년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세계반노예제대회에 여성들은 커튼으로 가려진 곳에서 대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참석이 허용되었다. 여성들은 침묵으로 항의하면서 복도에 앉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노예폐지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도 그들 옆에 앉았다. 여성들을 노예제 반대운동에서 들러리 취급하는 것은 여성들을 화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후 세네카폴즈에서 여성대회가 열렸다. 300명의 여성과 일부 남성들이 함께했다. 집회의 마지막에는 100명의 사람이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에 서명했다. 그 선언은 독립선언서의 구절과 운율을 차용한 것이었다. 행동선언은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흑인 여성도 백인 여성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여성의 영역’에 가두려는 시도에 저항했다. 그녀들은 죄수, 정신이상자, 흑인 노예, 그리고 모든 여성을 위한 모든 종류의 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운동이 한창이던 와중에 팽창하고 싶어하는, 더 거대해지고 싶어하는 충동이 미국을 강타했다. 미국인들은 더 많은 토지를 원했고,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인디언들에게서 빼앗으려 했다.

       

      2. 멈추지 않는 팽창 야욕의 시계

      (1) 풀이 자라거나 물이 흐르는 한

      미국인들은 인디언 이주령을 통해 애팔래치아 산맥과 미시시피 강 사이에 백인 거주지가 개척하고, 숲을 개간한 땅에 목화와 곡식을 심고 도로와 도시, 운하를 건설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이주로 인해 많은 인디언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피해 또한 짐작하기 어렵다.

      토지 투기업자이자 상인, 노예무역상이었던 앤드루 잭슨은 초기 미국 역사상 인디언에게 가장 호전적인 적이었다. 그는 1812년의 전쟁에서 유명해졌다. 이 전쟁은 미국의 생존을 위해 영국과 벌인 전투가 아니라, 사실은 전쟁을 통해 미국은 캐나다와 플로리다와 인디언 영토로 팽창시킬 목적이 있었다. 앤드루 잭슨의 부대는 크리크족의 마을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해했다. 1,000명의 크리크족과 싸워 아군에는 별 피해 없이 800명을 살상한 1814년의 Battle of Horseshoe Bend로 잭슨은 국민적 영웅이 됐다. 잭슨의 부대는 크리크족을 공격했다가 실패했을 때, 체로키족이 크리크족의 배후를 쳐서 승리를 거뒀다.

      전쟁이 끝나자 잭슨과 동료들은 크리크족 땅을 매점하기 시작했다. 1814년 그는 크리크족의 영토를 반으로 축소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새롭고 중요한 시작이었다. 앤드루 잭슨의 조약은 토지 공유 대신 토지의 개인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인디언들에게 심어주었다. 인디언들 가운데 일부는 땅으로 매수하고, 나머지는 추방하는 과정에서 인디언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후 10년간 앤드루 잭슨은 남부 인디언들과의 사이에서 체결된 여러 조약에 관여했다. 그 결과 백인들은 플로리다의 4분의3, 테네시의 3분의1, 기타 여러 주에서 약간의 땅을 차지하게 됐다. 이런 협정과 토지 약탈은 노예 대농장으로 이루어진 면화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어느새 백인 정착민들은 스페인령 플로리다 경계에 이르렀다. 그곳은 인디언 부족 세미놀족의 고향이자 탈출한 흑인 노예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다. 잭슨은 미국의 방위를 위해 플로리다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앤드루 잭슨은 플로리다를 습격하여 세미놀족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스페인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미국에 넘겼다. 플로리다의 주지사가 된 앤드루 잭슨은 친지들에게 노예와 땅을 사두라고 사업적인 조언을 했다.

      1828년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의 후계자 마틴 밴 뷰런의 통치하에서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7만 명의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정부 관료 루이스 캐스는 “야만인들은 문명사회와 접촉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는 말로 인디언의 강제 이주를 설명했다. 캐스는 인디언들이 미시시피 강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이동하기만 한다면 “미국은 그곳에서 다시는 당신들 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주는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디언에 대해 주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방법은 연방정부와 인디언 부족 사이에 맺었던 조약으로 인디언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앤드루 잭슨은 주(州)들에게 자율권을 주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디언들은 ‘강제로’ 서부로 몰아내지는 않았지만 남아 있기 위해서는 주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주법은 그들의 권리를 짓밟았다. 인디언들은 그들 부족과 개인의 권리를 파괴하고, 그들의 땅을 턱없이 탐내는 백인 정착민들의 끊임없는 괴롭힘과 침략을 감내해야 했다.

      이와 반대로 인디언들이 이주할 경우 연방정부는 그들에게 돈과 미시시피 강 서쪽의 땅을 제공해주었다. 결국 인디언 부족들은 차례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촉토족은 이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족민 50명이 돈과 땅에 현혹되어 미시시피 강 동쪽 땅을 미국 정부에 할양했다. 그 대가로 촉토족은 서부로 떠나는 이주비용을 지원받았다. 1831년 말, 촉토족 1만3,000명은 낯선 토양과 기후를 가진 서부를 향해 이주를 시작했다. 촉토족의 이주는 굶주림과 추위, 질병으로 수천 명씩 죽는 결과를 초래했다.

      1832년 잭슨은 무난한 재선 이후 인디언 강제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크리크족은 연방정부와 그들이 살던 땅 가운데 일부가 부족민들 개개인에게 주어질 것이며, 땅을 받을 사람들은 그 땅을 팔든 머무르든 연방정부가 보호해준다는 약속을 맺는다. 크리크족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믿고 떠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연방정부는 크리크족의 땅으로 몰려드는 백인들로부터 크리크족을 보호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크리크족이 백인 정착민들을 공격하자 정부는 그들의 전쟁행위로 인해 조약이 깨졌다고 주장했다. 미국 병사들은 크리크족 마을에 난입해 2,000~3,000명 단위로 묶어 서부로 보냈다. 낡고 썩어가는 배에 탄 채 미시시피 강을 건너면서 크리크족 사람들은 이주 중에 기아와 질병으로 수백 명씩 죽어갔다.

      1835년 12월 미국 정부는 세미놀족에게 이주를 위해 집결하라고 명령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놀족은 내륙부터 플로리다 경계선 전역을 따라 연속해서 기습을 가하며 해안의 백안 정착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전쟁은 8년 동안 지속되었고, 2,000만 달러와 미군 1,500명의 생명이 소모되었다. 세미놀족은 결국 1840년 휴전을 요청했지만, 휴전을 요청하러 오는 자는 오히려 체포되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조지아 체로키족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래서 정부는 신문을 폐간 시키고 정부를 해체 시켰다. 결국 체로키족도 연방정부와 이주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838년 10월 1일 유명한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를 떠날 첫 번째 집단이 출발했다. 감금과 굶주림, 질병, 가뭄, 비바람 등으로 4,000명의 체로키족은 눈물의 행로 도중 숨졌다. 1838년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은 체로키족의 이주는 최상의 행복한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2) 다행히도 정복으로 차지한 땅은 하나도 없다

      재퍼슨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국경을 로키 산맥으로까지 확장시켜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맥시코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원래의 멕시코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텍사스,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전부와 콜로라도의 일부가 모두 멕시코 영토였다. 1836년 텍사스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론스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연방의 주로 편입시켰다. 또한 당시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밝힐 정도로 팽창주의자였다. 신문 편집자 존 오설리번은 “아메리카 대륙에 뻗어나가야 할 우리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이다”라는 기사를 썼다.

      오랫동안 멕시코와 미국은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에서 북쪽으로 24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누이세스 강이었다. 그러나 텍사스가 독립을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텍사스인들은 리오그란데 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제임스 포크 대통령도 두 강 사이에 거주하는 멕시코인을 무시하고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따라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부대를 리오그란데 강으로 이동시키라는 포크 대통령의 명령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병사들이 리오그란데 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멕시코 주민들이 강을 건너 마타모로스 시로 달아나면서 다급히 버리고 간 경작지와 초가지붕을 발견했다. 군대는 전쟁을 할 준비가 됐고, 오로지 필요한 것은 계기였다. 멕시코인들은 미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순찰 중이던 병사들을 선제 공격했다.

      제임스 포크는 전투 소식이 전해지기 전부터 선전포고를 하자며 의회를 재촉했다. 의회는 선전포고를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전쟁에 환호했다. 그들은 전쟁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수천 명씩 군에 자원했다. 시인 제임스 러셀 로웰은 전쟁의 유일한 목적이 “새로운 노예주로 끌어덜이기만을 원허지”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법과 정의의 차이점에 대해서, 그리고 군인들이 어떻게 해서 자신들이 수행하고 있는 명령이 옳지 못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지에 대해 논했다. 전쟁 초기에 일었던 열기가 사그라들자 자원 입대자들도 잦아들었다.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신병에게도 보수를 지급하고, 전쟁을 마친 자원 입대자들에게는 땅도 주기로 했다. 징병에 응해 입대했던 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의 공포로 충격을 받고 탈영하기도 했다.

      멕시코로부터의 분리를 원하는 전쟁이 캘리포니아에서 발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미국인들은 스페인 정착민들을 습격해 말으 훔치고 캘리포니아가 멕시코에서 분리한다고 선언했다. 그사이 뉴멕시코를 통해 서쪽으로 진격한 미국 병사들은 전투도 치르지 않고 샌터페이를 장악했다. 12월이 되자 뉴멕시코의 타오스에서 멕시코인들이 미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반란군 다수가 달아나 산발적인 공격으로 미국인들을 죽였다.

      당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마타모로스를 점령한 상태였다. 남부로 진격하는 도중 병사들은 점점 통제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술에 취해 멕시코인들을 약탈했다. 그와 동시에 질병과 열기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후 미군은 이틀동안 베라크루스에 130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많은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윈필드 스콧 장군의 군대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를 놓고 교전했다. 승리의 대가로 미국이 얻은 것은 행군, 전투, 죽음의 공포로 인한 극심한 피로뿐이었다. 탈영도 문제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9,000명 이상이 탈영했다.

      승리의 영광은 대통령과 장군들을 위한 것이었을 뿐, 탈영병이나 전사자, 부상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군인이 자신들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터로 이끈 자들에게 분노했다. 귀향을 축하하는 만찬회에서 병사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참전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오자, 투기업자들이 정부가 지급한 토지 보증서를 사들이기 위해 나타났다. 돈이 부족했던 많은 군인들이 160에이커의 땅을 불과 50달러에 팔아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1848년 2월 멕시코와 미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했다. 멕시코가 남서부 전체와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양도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양국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합중국은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합중국은 새로운 영토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구입한 것이라는 명분이 생겼다.

       

      (3) 복종 없는 노예제, 자유 없는 해방

      1808년 미국 정부는 노예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전에 25만 명 정도의 노예가 불법으로 수입되었다. 미국 남부 경제가 전적으로 노예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최대 규모의 노예 반란은 1811년 뉴올리언스 근방에서 발생했다. 미국 육군은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다. 1822년 자유 흑인 덴마크 베시의 음모는 실행으로 옮기기도 전에 진압되어 3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른 노예들은 탈출을 택하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해마다 노예들이 약1000명씩 미국 북부, 캐나다, 멕시코로 탈출했다. 때로 노예들을 돕는 가난한 백인들은 집권층의 근심거리였다. 가난한 백인들이 노예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부유한 농장주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가난에 대한 분노에서 노예들의 불복종과 심지어 반란을 부추길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1830년 당시 북부에는 자유를 얻은 약 13만 명의 흑인들이 살고 있었다 20년 후에는 20만명으로 증가했다. 그들 대부분은 남부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활동했다.

      멕시코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새로 얻은 영토에 대해 자유주(州)로 규정했다. 그 대가로 노예주에는 1850년 탈주노예법을 통과시켜주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노예주들이 전에 노예였던 사람을 되찾거나 탈주 노예라고 지목한 흑인들을 그냥 잡아가는 일이 가능해져 악용될 소지가 다분했다. 북부의 흑인들은 탈주노예법에 저항했다. 법이 통과된지 1년 후에 탈출 노예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자 군중들이 들이닥쳐 법정르 부수고 그를 풀어준 일도 있었다. 미국 정부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을 강화하는 대신 탈주노예법만 강화시켰다.

      정부는 반란을 통한 노예제 종식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노예제 폐지는 북부의 정치경제적인 이익과 부합될 땨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야 말로 노예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링컨은 경제적인 요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화당과 정치적 야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노예제에 반대함과 동시에 노예제 폐지론이 새로운 문제들을 가져오지 않을까 ㅎ=우려하여 정치적으로 신중을 기했다. 링컨은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하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가 생각했던 가장 좋은 해결책은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서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북부의 엘리트들은 경제적인 팽창을 원했다. 그들은 자유토지, 자유노동, 자유시장, 기업에 유리한 세금 등을 원했다. 반면 남부의 농장주들은 링컨과 공화당이 장차 자신들의 활달하고 번창하는 생활방식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링컨이 단선되자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했다. 링컨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오새의 연방 기지를 무력으로 탈환하려 하자 4개 주가 추가 탈퇴했다. 남부 측은 남부연합을 조직했고.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부를 연방에 복귀시킬 목적이라고 밝혔다. 점점 북부 측에 전황이 불리하게 되면서 링컨은 마침내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1862년 9월 그는 남부가 싸움을 계속할 경우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는 내용의 임시 노예해방령을 선포하며, 4개월간의 휴전을 제의했다. 1863년 1월 1일 링컨은 연방에 대항하는 지역의 노예를 자유인으로 선포하는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2년의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의회는 미국 내의 모든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수정 헌법 제13조를 통과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흑인들에게 여러 면으로 영향을 주었다. 흑인들이 연방 측 군대에 자유롭게 입대할 수 있게 되면서 전쟁은 더욱더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백인들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들은 흑인들을 더 원망했다. 누구보다 가장 화난 사람들은 강제로 징병된 가난한 백인들이었다. 부자들은 300달러로 대리인을 입대 시킬 수 있었다. 1863년 징병에 반대하는 폭동이 북부 도시에서 일어났고, 흑인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잇달았다.

      남북전쟁은 그때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전쟁의 하나였다. 당시 인구가 3,000만 명임을 고려할 때, 60만 명의 사라진 생명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자 남부연합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고, 일부 지도자들은 점점 더 장애물로 변해 가는 노예들을 이용해 입대 시키거나 자유를 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흑인이 좋은 군인이 된다면 노예제에 관한 남부 측의 이론 전체가 그릇된 것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1865년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흑인들은 입대 시킨다는 법안에 서명했으나, 그 법안의 효력이 발생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난다.

      많은 흑인들은 전쟁 후 자신들의 지위가 법률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처지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면 남을 위해 일하는 반(半)노예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남부의 토지는 남부연합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에게 반환되거나 북부에서 온 부동산 투기꾼에게 팔렸다. 흑인들에게는 땅을 살 여유가 없었다. 자유를 얻은 흑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여전히 백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가 노예주들과 싸운 것은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부의 막대한 영토와 시장, 자원을 얻기 위해서였다. 노예제의 종식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불러왔다. 그 세력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무언가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결심한 더 많은 흑인들, 인종 평등에 관심을 갖게 된 더 많은 백인들이었다. 또한 남부 흑인들의 표를 통해 연방정부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려는 공화당의 강력한 이해도 존재했다. 북부 사업가들도 공화당의 정책이 이해를 같이한다고 판단하여 일시적으로 협력했다. 그 결과 남북전쟁 뒤 잠시나마 남부의 흑인들이 투표하고, 주의회와 미국 상하 의원에 당선되어 진출하고, 자유롭고 인종적으로 통합된 교육을 선보일 수 있게 했다. 새로 제정된 법들은 흑인들을 차별로부터 보호하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일자리 때문에 백인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탓에 흑인들의 투표권은 매수되거나 무력의 위협 앞에서 무의미하게 됐다.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폭력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남부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남부의 소수 백인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활용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을 비롯한 테러집단을 조직했다. 1870년대에도 백인들의 폭력이 점증하자 연방정부는 흑인들의 보호에 대해 점차 방관하게 되었다. 북부의 정치가들은 가난한 흑인들의 정치적 지지에서 얻는 이익과, 공화당을 받아들인 백인들이 장악한 남부의 안정적인 상태에서 생기는 이익을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흑인들이 또다시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미국 대법원이 인종에 따른 격리를 허용하는 법안을 승인하는데, 한 명의 대법원 판사만이 “우리의 헌법은 색맹이다”는 말을 남기며 반대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1877년 공화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후보인 러더퍼드 헤이스를 당선시키기 위한 거래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당선에 필요한 표를 얻는 대가로 남부에 주둔 중인 연방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이는 남부 흑인들에 대한 마지막 군사적 보호마저 사라진 것이다.

      남부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북부의 금융가와 투기자, 남부의 엘리트계급 사이에 새로운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석탄광산과 철광산, 사업과 철도를 통한 ‘새로운 남부’를 추구했다. 1900년 무렵 남부의 모든 주가 흑인들에게서 투표권과 평등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하기에 이른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 이르자 미국 흑인들은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었다. 흑인을 총으로 살해한 백인은 자유방면 되는 반면, 돼지 한 마리를 훔친 흑인은 10년의 강제노역형을 살게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4) 또 하나의 남북전쟁

      남북전쟁은 19세기 미국에서 나타났던 유일한 내부 갈등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내전, ‘계급 갈등’이 있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사회의 비천한 성원들’, 즉 노동자나 농부 같은 사람들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 확실히 그는 자신들의 땅에서 밀려나는 인디언이나 노예들을 대변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정부는 지지를 위해 ‘잭슨식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이는 보통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부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정부가 보살피고 있다고 믿게 했다. 이것은 정부가 필요할 때 중하층계급에게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민에게 두 정당을 놓고 조금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당을 선택할 권한을 준다는 것은 국민을 통제할 수 잇는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지나친 개혁은 금물이었다. 점진적 개혁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1790년의 미국 도시 인구는 100만도 되지 않았으나, 1840년에는 1,100만으로 늘었다. 뉴욕만 해도 1820년에 13만명이었던 인구가 1860년에는 100만명이 됐다. 그러나 수많은 민중들은 가난에 허덕였다. 필라델피아의 노동계급 가족은 상하수도조차 없는 원룸에서 살았다. 뉴욕의 빈민들은 쓰레기더미와 함께 노숙했다. 이런 열악한 시설은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극빈층에게서 정부에 대한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존재는 노예나 인디언들과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번 들고일어나면 상층계급 사람들을 기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극빈층이 아닌 사람들은 현 체제를 지지했다. 자작농민,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은 적절하게 위신을 세웠다. 위기가 닥치면 상층계급에 지지를 보냈다. 상층계급이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운하, 철도, 전신 체제의 발달에 힘입어 서부 시대가 개막했다. 철제 쟁기나 자동수확기 같은 새로운 장비들은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경제는 호황기와 불황기가 번갈아 나타났다. 안정을 찾고 경쟁을 줄이는 방안으로 회사들이 합병했다. 또한 회사들은 담합을 하여 가격을 통제했다. 더불어 1850년대에 정부는 철도회사에 2,500만 에이커의 공유지를 무상으로 주었고, 수백만 달러의 공채도 허용해주었다. 남북전쟁 말기에 국가 운영자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돈과 이윤이었지 노예제 반대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통제를 위한 노력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인구의 도시집중, 공장의 긴 노동시간, 물가상승과 실업, 끔찍한 주거시설, 질병 등이 간헐적인 빈민들의 저항을 낳았다. 가끔 부자들에게 대항해 산발적인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분노가 흑인들, 가톨릭 신자들 또는 이민자들에게 향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빈민들이 금융가, 부동산 투기자, 지주, 상인 등 경제를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조직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1829년 미국 최초로 도시 전역에 걸친 노동자대회에서 프랜시스 라이트는 독립 혁명이 “산업 역군들인 아들딸을 억압하기 위한 투쟁”이었는지 문제 제기를 했다. 그녀는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노동 가치를 떨어뜨리고, 사람들을 기계의 하인을 종속시키며,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아이들의 심신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노동조합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자들이 결속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1835년에 필라델피아에서는 50개의 각기 다른 직종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됐다. 그들은 노동시간 하루 10시간으로 제한될 때까지 파업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법원은 시위에 나섰던 재단사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하자 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는 군중 2만7,000명이 모였다. 시간이 지나 뉴욕 주 여러 읍의 농민과 노동대중이 스스로 입후보자를 선거 출마를 위해 평등권당을 창당했다. 경제적 위기는 음식, 연료, 집세의 상승을 야기했다. 뉴욕시에는 전체 노동계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만명의 실업자들이 존재했다. 평등권당은 대규모 집회를 마련했는데, 군중이 밀가루가 가게에 들이닥치는 순간 폭동으로 바뀌었다.

      가난하고 멸시 받는 이민 집단들은 미국 흑인 노예들의 어려움에 대해 동정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노동운동가가 흑인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었다. 상층계급에 대한 노동계급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질수록 인종차별도 일종의 화풀이로 격해졌다.

      1850년 당시 노동자 600만명 가운데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약50만 명이었는데, 대부분은 하녀였고, 나머지는 교사이거나 공장에서 일했다. 여성들은 노동조건의 개선(11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반복적으로 파업을 했다. 메사추세츠 주 린의 구두공장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는데, 25개 마을로 확산되어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공장주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일터로 복귀시키기 위해 높은 임금을 제시했지만,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고용주와 대면해야 했다. 남북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북부의 노동자들은 임금이 전혀 인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높을 물가에 시달렸고, 전국적인 파업으로 이어졌다. 또한 연방군의 징병에 관해 갈등이 빚어졌다. 징병법에 따라 300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 부자는 면제를 받았지만, 빈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러 도시에서 징병에 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폭도는 부자, 흑인, 공화당원에 분노를 표출했다. 남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빈민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부자는 돈으로 면제받았다. 남부에서도 징병 거부 폭동이 일어났다.

      전쟁의 소음으로 정신 없는 가운데 의회와 링컨은 사업가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일련의 법규를 만들었다. 모릴관세법은 외국 상품을 비싸게 만들어 미국 제조업자가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있게 함으로써 소비자들은 더 비싸게 구입해야 했다. 계약노동법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미국 이민을 위한 비용을 노동으로 대신하도록 합법화 시켰다. 이것은 사업가들에게 저렴한 노동력뿐만 아니라 파업을 방해할 수 있는 세력까지도 제공해주었다. 법은 노동자들을 보호하려는 겉치레조차 하지 않았다. 건강과 안전에 관한 법률은 있지도 않았거나 있어도 시행되지 않았다.

      1870년대 내내 불황은 지속됐다. 철도 노동자들의 연속적인 파업이 나라를 뒤흔들었다. 철도 노동자들의 폭동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고, 군대의 총격으로 사살되자 도시 전체가 분노에 휩싸였다. 대규모의 철도 파업은 전국 철도 화물열차의 절반 가량의 운행을 중단시켰다. 파업이 끝났을 때 100명이 사망했고, 1만명이 감옥에 갔다. 철도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혜택을 보장해주었으나 변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부자들과 정부 권력의 결속을 물리칠 만큼 단결해 있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 악덕 자본가들과 반란자들

      남북 전쟁에서 1900년에 이르는 동안 증기와 전기가 인력의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에는 31만 킬로미터의 선로가 건설되었다. 전화, 타자기, 계산기 등은 사무작업을 가속화시켰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공장의 기계를 작동시켰고, 도시도 밝힐 수 있었다. 발전에는 노동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많은 이민자가 유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은 그들의 몫이었다. 새로 이민 온 중국인과 유대인은 인종차별에 의한 폭력의 표적이 되었다. 이민자들에 대한 폭력은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고, 그로 인해 생산된 부가 피라미드처럼 구조를 이루었다.

      당대를 풍미한 거부들은 상류층이나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이들은 정부와 법의 비호를 받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는 두 철도회사에 의한 피와 땀, 정치적 책략, 도둑질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뼈를 거액의 뇌물로 잘 포장한 것이다. 상품의 판매가격은 높게,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게 유지함으로써 경쟁자들을 물리쳐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과 세금을 만들어주는 정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은 사업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자신들의 제국을 키워나갔다. 국가의 목표는 상층계급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하층계급의 반란을 통제하며 체제의 장기적인 안정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항해 새로운 정치적 위험 세력들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가 등장했다. 사회주의란 농장, 광산, 공장과 같은 모든 생산 수단들이 국가 또는 국민 전체의 소유가 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이는 공동 이익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 자체와 재산에 근거한 계급 구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물건이 모든 사람의 소유이며,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정부주의는 정부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불필요하다고 주장이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 세력은 사회의 부가 소수에 집중되는 것은 진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교회와 학교, 대중문학은 부자가 된다는 것이 우월함의 징표이고 가난은 개인적 실패의 징표이며, 자본주의 체제는 옳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1886년 5월 1일 결성한지 5년째인 미국노동연맹은 8시간 노동을 거부하는 모든 공장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전국 1만1,500여곳에서 약35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5월 4일 헤이마킷 광장에서 집회가 소집되어 약3,000명이 모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집회였는데도 경찰들이 강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때 폭탄이 터졌고 경찰 66명이 부상을 입고 그 중 7명은 숨졌다. 경찰은 군중들에게 총을 쏘아 몇 명을 살해하고 20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폭탄을 투척한 용의자를 검거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지만, 집권층에서는 여덟 명의 아나키스트들을 살인 조장 혐의로 체포했다. 사실 그들 가운데 그날 헤이마킷에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곱 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은 전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해마다 헤이마킷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헤이마켓 사건에서의 가혹한 판결도 노동운동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1886년은 노동자 대반란의 해로 기억된다. 남부의 사탕수수 농장, 테네시의 탄광, 철도 노동자에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휩쓸었다. 농부들은 서로 도울 수 있도록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농부들이 함께 행동함으로써 자신들만의 기구를 조직하고 정치적 단체를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이 인민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인종에 따른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일부 백인 인민주의자들은 강한 인종주의에 빠져있었다. 수많은 인민주의자들은 새로운 이민자를 반대했다. 결국 인민주의 운동은 흑인과 백인, 그리고 농부와 도시 노동자의 연합에 실패했다. 인민주의는 선거에서의 승산을 높이기 위해 민주당과 제휴했다. 결국 인민주의 운동은 민주당 정치라는 바다에서 익사하게 됐다. 그러나 1896년 대선에서 자본의 힘으로 윌리엄 매킨리가 당선되면서 인민주의는 언급조차 될 수 없게 됐다.

       

      (6) 제국과 민중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요소에서 자연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다. 자본주의는 더 넓은 시장을 요구했다. 그리고 강렬한 민족적 자긍심을 뜻하는 민족주의는 국민으로 하여금 미국에 팽창할 권리와 다른 나라들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쿠바인들이 독립 혁명에서의 식민지인들처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으므로, 미국이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스페인이 물러간 후에 누가 쿠바를 통치할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쿠바에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도 중요한 문제였다. 클리블랜드 행정부는 쿠바 반란군의 승리가 ‘백인과 흑인의 공화국’을 초래할까 봐 두려워했다. 미국이 쿠바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는 쿠바 수도 하바나 항에서 일어난 폭발로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폭발 원인에 대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로 인해 미국과 매킨리 대통령은 참전을 결정했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목표는 스페인과의 전쟁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확보 역시 미국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자명했다.

      스페인 군대는 석 달 만에 패배했다. 미군은 쿠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이 항복했을 때, 어떤 쿠바인도 항복조건을 협의하거나 항복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 미국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미국 군대는 쿠바에 잔류했다. 그 직후 미국의 자금이 쿠바에 유입되었으며 미국인들이 철도, 광산, 사탕수수 농장 등을 장악했다. 미국은 쿠바 국민들에게 그들의 헌법에 따라 정부를 설립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쿠바의 새로운 헌법에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플래트 수정안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미군은 철수하지 않겠다고 했다. 플래트 수정안은 미국인 원할 때면 언제든 쿠바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쿠바는 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플래트 수정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쿠바를 합병하거나 미국 영토에 편입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이 수많은 나라를 직접 병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 인접한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그리고 하와이를 비롯해 괌의 웨이크아일랜드와 필리핀도 지배할 수 있게 됐다. 필리핀에서 미국에 대한 반란도 문제였지만 인종 갈등 또한 심각했다. 미국의 일부 백인 병사들은 필리핀인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흑인 병사들의 반응은 복합적이다. 일부 흑인은 흑인도 다른 사람들만큼 용감하고 애국적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일부는 군대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머지 흑인 병사들은 끔찍한 일을 한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술 취한 백인병사들이 흑인 소년을 과녁 삼자 인종 폭동을 일으켰던 미국의 흑인에 대한 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흑인들은 필리핀전쟁을 인종적인 갈등이자 백인들이 유색인종 정복을 위해 벌이는 싸움이라며 반대했다.

       

      3. 전쟁을 위한 전쟁, 살아남기 위한 시위

      (1) 사회주의의 도전

      기업은 대량생산과 더욱 많은 이익 창출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한 가지 방법은 제조과정의 분업화였다. 노동자는 한 과정의 동일 작업만 반복하면 되었다. 그 결과 공장에서는 숙련공의 필요성이 감소되었고, 노동자들은 개성과 인성이 사라진 교환 가능한 존재가 되면서 기계처럼 전락했다. 갖은 파업에도 공장들의 노동조건은 바뀌지 않았다. 1911년 3월 트라이앵글 셔츠 회사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 내 너무 높은 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소방대원들의 사다리가 닿지 않았다. 고용주들이 불법적으로 작업실 문을 잠근 탓에 대부분 젊은 여성들인 노동자들은 갇혀 있었다. 그렇게 146명은 타 죽거나 창밖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미국노동연맹은 배타적인 노동조합이었다. 흑인들은 제외됐다. 1910년에 여성들은 전체 노동자의 5분의1을 차지했지만, 실제로 조합에 가입한 여성 노동자는 100분의1에 불과했다. 급진적인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의 필요했다. 1905년 시카고에서 열린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급진적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집회에서 그러한 조합을 만들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란 명칭으로 성별이나 인종, 숙련도에 의해 분열되지 않는 ‘거대 단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 IWW 사람들은 힘에는 힘으로 대항했다. IWW는 파업을 통제하려는 주(州) 경찰이 파업 중인 노동자를 한 명 죽일 때마다 그 수만큼 경찰관의 목숨을 빼앗았다. 탄생 직후 다사다난했던 10년의 세월 동안 IWW는 미국 자본가계급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그들이 파업을 조직하는 능력은 전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노래와 연설로 자신들의 메시지와 정신을 전파했다.

      파업투쟁은 급증했다. 1890년대에는 해마다 1,000건씩 파업이 발생했으며, 1904년에는 4,000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법률과 군대는 부자들의 편을 들었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도시 이민의 소규모 집단을 벗어나 미국적인 것으로 변모했다. 사회주의 정당이 1901년에 조직되었고 유진 뎁스가 대표였다. 뎁스에게 노동조합은 파업이나 임금 인상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모든 인류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일부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참정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허울뿐이고 사회의 혁명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인 여성들은 인종과 성별이라는 두 가지 문제로 두 배의 차별을 받았다. 특히 20세기 초반은 흑인들에게는 최악의 시기였다. 흑인들은 매주 보고되는 빈번한 린치와 인종 폭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흑인들은 나이아가라 운동을 하고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결성했다.

      이 시기에 흑인, 페미니스트, 노동조직가, 사회주의자 등에게 분명했던 것은 연방정부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사책에서는 20세기 초를 ‘혁신주주의 시대’로 명명하지만 그것은 마지못한 개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민중의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시대를 혁신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육류 검사, 철도 규제, 의약품 안전에 관한 것들이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임금과 노동시간에 관한 기준이 마련됐다. 공장에 대한 안전감독과 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도 보장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소작농과 공장 노동자, 빈민가 거주자, 광부, 농업 노동자 등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 노동대중에게 있어 근본적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혁신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혁신주의자를 가장한 보수주의자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이다. 이들은 변화에 반대했으며 부와 권력의 균형 유지에만 신경 썼다. 목표는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중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함으로써 이른바 ‘사회주의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혁신주의자들은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면서 자본주의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투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성장을 거듭했다.

      1913년 9월 콜로라도에서 시작된 광부들의 파업은 계급투쟁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되었다. 광산 소유주였던 록펠러 가문은 파업 중인 광부들을 습격하기 위해 총잡이들을 고용하고 개틀링 기관총과 라이플총을 쥐어줬다. 주지사는 주 방위군을 투입했고, 록펠러 측에서 급료를 지급했다. 격렬한 싸움과 학살이 이어졌다. 파업노동자가 아닌 어린이와 여성들이 살해되었고, 러들로 학살의 소식은 전국으로 퍼졌다. 전국 곳곳에서 파업과 항의 시위가 이어지만, 이 또한 연방군대의 군화에 짓밟히는 결과로 이어진다.

       

      (2) 전쟁은 국가의 건강한 상태이다

      1914년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4년 간의 전쟁에 휘말렸다. 100만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2,000만명이 전쟁으로 인한 기아나 질병으로 죽어갔다. 어느 누구도 전쟁이 인류에게 한 인간의 생명만한 가치를 가진 어떤 성과라도 가져다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수사는 오히려 온건한 표현으로 보인다.

      전쟁 초기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양측은 5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개전 후 약 3개월 동안 기존의 영국 정규군은 거의 사망했다. 전선은 프랑스에서 정체 상태였다. 양측은 몇 미터, 몇 킬로미터를 얻으려고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시체만 쌓여갔다. 미국이 이 죽음의 구덩이에 발을 들여놓기로 한 것은 1917년이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영국을 위해 군수품을 운반하던 루시테이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고, 이에 미국은 참전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였다. 1914년 심각한 경제 위기가 닥쳐왔었지만 미국이 연합국, 특히 영국에 수출할 군수물자를 생산하면서 상황은 호전되었다. 독일이 적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선박들은 무조건 격침하겠다고 경고했을 때, 이미 미국은 20억 달러에 달하는 물자를 연합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미국의 번영은 영국의 전쟁에 달려있었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이 전쟁을 끝내고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더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장난에 속아 자원 입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회는 징병을 결의했다.

       정부는 전쟁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방첩법을 제정했다. 9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방첩법으로 감옥에 갔다. 언론은 정부가 전쟁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사람들의 편지를 강제로 빼앗고, 집과 사무실에 들이닥쳐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을 신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엄청난 노력을 한 이유는 미국인들이 참전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병역을 거부하거나, 면제받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전쟁은 미국이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을 와해 시킬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1917년 법무부는 전국적으로 48개의 IWW 집회장을 습격했고 편지와 문서를 압수했다. 다음해 4월, IWW의 지도층 101명이 방첩법으로 재판을 받았다. IWW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미국의 IWW는 와해됐다.

      1918년 11월 전쟁이 종식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을 때, 기득권층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두려워했다. 그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전쟁 막바지에 의회는 미국 정부에 반대하거나 재산 파괴에 찬성한 외국인을 추방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득권층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애썼다.  전쟁도 맹목적인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비판 의식을 막기 위해 이용됐다.

       

      (3) 어려운 시절의 자조

      IWW 지도자들은 수감되어 있었지만, 10만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벌여 5일 동안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킨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총파업이라는 연맹의 이념은 현실이 됐다. 파업은 평화적이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자 사회당 본부와 인쇄소에 대한 습격과 체포가 진행됐다. IWW의 회원 39명이 ‘무정부상태를 야기한 주모자’로 투옥됐다. 총파업은 권력자들에게 무력감을 체험하게 했다. 그것은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192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반란의 물결이 가라앉고 있었다. IWW는 파멸되었고 사회당은 분열했다. 파업은 무력으로 분쇄됐고 경제는 대중의 반란을 방지하기에 충분한만큼만 호전되었다.  1920년대는 ‘흥겨움의 시대’ 또는 ‘재즈의 시대’라고도 한다. 번영과 흥겨움의 시대라는 뜻으로, 표현 속에 진실이 담겨있다. 실업률은 감소했고,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도 올라갔다. 국민은 자동차, 라디오, 냉장고 등 새로운 도구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상층부에 집중됐다. 한편 흑인 및 백인 소작농, 일자리가 없거나 있다 해도 생필품을 구할 만한 돈조차 벌지 못하는 대도시의 이민자 가족들은 궁색한 삶을 살았다.

      1900~1920년까지 1,400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인종적인 혐오는 곳곳에서 발생했다. KKK단도 1920년대에 부활했다. 단원 수가 450만에 이르렀다. 헌법 수정조항 19조가 통과됨으로써 여성은 투표권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당이 약화되면서 공산당이 조직됐다. 공산주의자들은 1929년 초 테네시와 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났던 방직공의 대규모 파업을 비롯한 많은 노동투쟁에 관여했다.

      1929년 호황은 끝이 났다. 주가가 하락하자 공황 상태에 빠진 살마들은 주식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행위는 주가 하락을 더욱 부추겼다. 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었고, 주식 투자의 실패로 고객에게 출금을 해줄 수도 없었다. 주식시장과 금융체제는 빠르게 붕괴되었고, 그로인한 심각한 경제위기, 즉 대공황에 돌입했다. 5000개가 넘는 은행들과 수천개의 회사가 도산했다. 도산하지 않은 회사는 임금 인하와 해고가 불가피했다. 국가 전체 노동력 가운데 4분의1가량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식량과 재화는 넘쳐났지만 팔아도 이윤이 남지 않았고, 사람들은 물건을 구매할 형편이 못 되었다. 빈 집이 많았음에도 사람들은 집을 사거나 집세를 낼 돈이 없기 때문에 후버빌(판자촌)에서 살았다. 실업과 굶주림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며 워싱턴 D.C에 참전군인 2만명이 집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탱크을 앞세워 그들을 밀어버렸다.

      1932년의 선거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당선됐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을 단행했다. 뉴딜에 의한 변화는 그 전에 이루어졌던 변화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본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뉴딜정책에서 첫 번째 주요 법안은 전국부흥법이었다. 이 법은 경여자와 노동자, 정부가 동의한 일련의 규약에 의해 물가와 임금을 고정시키고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개혁으로서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가 있었다. 국유체제의 댐과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일자리 창출과 전기 요금을 인하시켰다.

      뉴딜정책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경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반란이 현실적인 혁명으로 전환되지 않기에 충분할 만큼 하층계급들을 돕는 것이었다. 반란은 실제로 있었다. 절망적인 민중은 정부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도우면서 직접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자력구제는 디트로이트, 시카고, 시애틀, 펜실베이니아 등 전국적으로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노동자들은 필요한 것을 스스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노동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입법의 필요성이 일련의 파업을 통해 드러났다. 태평양 연안의 부두 파업을 시작으로 흑인 농부들, 고무농장 노동자들,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역대급 규모의 파업에 나섰다. 이런 종류의 노동 불안을 중단시키기 위해 정부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를 창설했다. 위원회는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흥미롭게도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가 인정되고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이전 시절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 사회 일각에서는 대공황이 점차 회복될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노동시간을 주 40시간 이하로 제한하고 유아 노동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다. 사회보장법은 퇴직연금과 실업보험을 제공했다. 그러나 흑인들은 뉴딜정책으로 받은 혜택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소작농과 농장 막노동자, 이민자, 가내 노동자들로 근무했기 때문에 실업보험과 최저임금, 사회보장, 농장 보조금 등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구직에 있어서도 흑인은 간신히 일자리를 구했으며, 구하더라도 쉽게 잃었다. 린치와 인종 차별은 여진했다.

      뉴딜정책으로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여전히 국가의 부를 지배하고 있었고 법률과 법원, 경찰, 신문, 교회, 대학들 역시 수중에 장악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수백만의 영웅이 되었지만, 대공황을 초래한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4) 인민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이제까지 싸워 왔던 전쟁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이유는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공격이 아니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영국에 중요한 원조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독일이 여라 나라를 침략했을 때에도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다. 일본의 중국 침략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을 전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게 만든 계기는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었다. 루즈벨트가 격분해 전쟁을 호소하게 된 이유가 일본의 민간인 폭격에 대한 인도적 관심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미국 중심의 태평양 제국의 연결고리에 가해진 타격이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던 원인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러시아를 도와 참전했다. 미국이 대서양헌장에서 대외적으로 밝힌 전쟁의 목표는 “모든 민족이 자신들이 살아갈 정부의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서양헌장 선포 2주 전에 미국은 프랑스 측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식민지를 돌려받을 것이라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독일은 유대계 소수민족을 박해하고 종교에 관계없이 반대파를 투옥하여 게르만 인종의 우월성을 선언했다. 미국은 이러한 히틀러의 박해 정책에 관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바라보는 미국 흑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군대는 인종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심지어 혈액은행조차도 백인의 혈액과 흑인의 혈액을 따로 보관했다. 인종주의는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대우에서도 드러났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종식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의 일본도 항복을 준비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일본인에게 신과 같은 존재인 천황의 지위를 보장한다는 항복의 단 하나의 조건을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도 항복했다. 일본에 천황 제도만 보장해주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은 일본이 소련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것은 명확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전쟁으로 거대 기업들은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배분해주었다. 농부들은 더 높은 농작물 가격을, 일부 노동자들은 임금을 올려 받았다. 국민은 반란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부유해졌다. 전쟁이 통제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체득한 오래된 교훈은 딱 들어맞았다. 이런 상황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영구적인 전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위기와 냉전의 분위기를 구축했다. 냉전의 시기 동안 미국의 적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었다.

      소련과의 경쟁은 사실이었다. 소련은 전쟁 이후 놀라운 회복세를 보이며 경제를 개건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을 단지 경쟁자가 아니라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조장했다. 유럽과 아시아이 혁명운동은 미국 국민에게 소련의 팽창주의의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냉전과 반공정책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공화당과 민주당의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합의 형성을 가속화 시킨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35년 동안 일본에 점령당했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았지만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독재국가로, 남한은 보수적인 독재국가가 되었으며, 각각 소련과 미국에게 예속되었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 그때에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형성된 국제연합이 존재하고 있었다. UN은 회원국들에 남한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UN군이 전면적으로 밀어붙여 중국과의 국경에 이르렀을 때, 중국이 북한을 도우며 전쟁에 개입했다. 3년 동안의 전쟁에서 200만 명의 한국인이 숨졌다. 전쟁 후 한반도의 분할 점령 군사분계선은 처음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한국 전쟁으로 미국의 진보 세력이 보수 세력과 힘을 합쳐 전쟁과 대통령을 지지하게 되었다.

      좌파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좌파를 약화시켜야 했다. 미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사냥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반공전쟁에 힘을 실어주었다. 체코슬로바키아나 중국에서 공산당이 득세하고 있었다. 유럽의 식민지들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내에 있는 공산주의 반역자를 색출했다. 심지어 증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해진 경우도 생겼다. 1960년 무렵에 좌파는 성공적으로 약화됐다. 뉴딜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급성장했던 공산주의적 급진파는 붕괴됐다. 냉전은 국가의 영구적인 전시 경제를 유지시켰다.

       

      (5)아니면 폭발해 버릴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일어났던 흑인 폭동은 백인의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흑인의 억압된 역사를 고려하면 사실 놀랄 일이 아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인종에 대한 조치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좌절감에 빠진 미국 흑인을 달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세계에 보여줄 미국의 이미지가 필요해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인종 폭력, 직업 및 투표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법안을 제시했지만 의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에 인종차별 및 인종에 따른 분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군대 내에서는 인종차별이 사라졌고, 흑인들과 백인들은 함께 병영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립학교에도 인종에 따른 분리가 존재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에서 대법원은 전국의 공립학교에 학생을 인종에 따라 분리하여 처우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남부 학군의 75% 이상이 여전히 인종분리를 실시했다. 그럼에도 그 결정은 미국은 인종차별을 불법화했다는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43세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시내버스의 백인 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먼고메리의 흑인들은 시내버스를 보이콧하고 승차를 거부했다. 흑인들의 출근을 돕기 위해 카풀이 조직됐고 대부분은 걸어 다녔다. 정부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보이콧했으며, 마침내 대법원은 시내버스의 인종에 따른 분리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보이콧을 지지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비폭력을 실천하라고 주장했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정의를 추구하라는 그의 메시지에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들 사이에서도 추종 세력이 형성되었다. 남부 흑인들의 비폭력 운동은 계속됐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로에 있는 흑인 대학생 4명이 백인 전용인 간이식당에 앉기로 결심하면서 비폭력운동이 시작됐다. 식당에서 그들을 거부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의 앉아있기 운동은 다른 남부 도시에도 확산되었다. 1960년 말에 이르러 여러 간이식당이 흑인들에게도 개방됐다.

      연방정부는 여전히 폭력으로부터 흑인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민권과 관련한 소동들이 계속되고, 그에 대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의회는 민권에 관한 몇 개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대표적으로 보다 강력한 투표권법이 통과되면서 백인과 흑인의 투표율이 같아졌다. 연방정부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 민감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흑인들의 분노를 투표소나 공식적으로 인가 받은 조용한 집회 등 보수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바랐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에서 주도했던 대규모 시위행진이 그런 집회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장엄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구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연설에는 많은 흑인이 느끼고 있던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두 달 후 맬컴 엑스라는 흑인 투사는 워싱턴에서 있었던 그 시위행진에 대해 시위행진의 지도자들이 행진을 서커스로 만들었고 행진을 탈취했다고 주장했다. 백인들은 여전히 흑인 교회를 폭파하고 아이들을 죽였다.

      비폭력은 민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중들의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존경은 여전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력이 그를 대신했다. ‘블랙 파워’가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그들은 백인들이 제공하는 모든 진보에 대한 의심과 온정주의에 대해 거부했다. 맬컴 엑스는 블랙 파워의 대표적인 연설가였다. 그는 연설 도중 암살당한 후 살아있을 때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빈곤과 같은 민권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여했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 또한 암살자에게 저격당한다. 킹의 죽음은 폭동의 계기가 되었다. 흑인들은 폭력과 부당함이 미국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부는 흑인들의 관심이 빈부 격차의 문제에 이전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난한 백인들과 흑인들이 규합한다면, 대규모의 계급투쟁이 현실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역사적으로 효과적이었던 방법을 사용했다. 경제적인 미끼로 일부 소수를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 흑인들에게도 개시됐다. 그리하여 백인 소유의 은행은 흑인 기업들을 지원해주었고, 신문과 텔레비전에는 흑인이 많이 등장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이런 변화들은 일부 젊은 흑인 지도자들을 주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점점 더 많은 흑인들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빈민가의 하층계급 흑인들을 괴롭히던 실업, 빈곤, 범죄 등의 문제의 해결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난한 백인들과 가난한 흑인들이 직업, 주택, 그리고 열악한 학교 등을 놓고 경쟁할 때, 새로운 인종적 긴장이 시작되어 있었다.

       

      (6) 불가능한 승리, 베트남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강대국이 10년 가가운 시간을 소비하면서 약소국과 싸워 이겨보겠다고 애스다 결국에는 실패했다. 미국이 베트남과 벌인 전쟁은 현대적인 군사기술과 조직적인 인간과의 대결이었다. 거기에서 인간이 이긴 것이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을 일으켰다. 대대적인 반전운동은 베트남전쟁을 종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전쟁의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던 베트남은 전쟁 중에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한 혁명운동이 공산주의자 호치민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나자 혁명군은 베트남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으나,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북구 혁명군이 저항했고, 그것이 프랑스와의 8년에 걸친 전쟁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에 10억 달러에 이르는 지원금과 대량의 무기를 지원했다.

      미국이 프랑스를 원조한 공식적인 이유는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에는 이미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냉전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로 공산주의가 미국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야 말로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고무, 주석, 석유 등 동남아시아 자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에 베트남에 미국을 적대시하는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결국 북부 베트남에서 철군했다. 평화협정에 따라 베트남독립동맹은 북부에 머무르는 데 동의했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는 2년 후 통일을 이루기로 되어 있었고, 국민은 선거를 통해 자립 정부를 세우도록 되어 있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통일을 막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남베트남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응오딘디엠 중심의 정부를 세웠다. 그는 미국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디엠 정권은 인기를 잃어갔다. 디엠은 불교 국가에서 가톨릭교도였으며, 농민 국가에서 지주에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행정부는 남베트남을 통제하는 데 디엠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판단을 내렸다. CIA는 디엠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베트남 장군들은 해변에 있는 대통령궁을 공격하고 그와 그의 동생을 처형했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북베트남이 미국 해군의 함선을 어뢰로 공격했다는 거짓 뉴스를 알렸다. 그 공격은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전쟁 명분을 제공했다. 당시 의회는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도 동남아시아에서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주었다. 미국은 베트콩이 숨어 있다는 판단하에 베트남 전역을 폭격했다. 생화학무기도 사용되었다. 미군이 베트콩을 색출하기 위해 촌락을 기습했을 때, 적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들었다. 1968년 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미군은 마을 사람을 집합시킨 후 도랑에 몰아넣고 사격했다. 육군은 미라이에서 저지른 일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밝혀져 몇 명의 장교들이 재판을 받고, 3년 만에 석방됐다. 미국은 베트콩을 작전기지에서 격리시키고 보급선을 파괴하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폭격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의 잔인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여전히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국민이 전쟁을 반대했다. 특히 정부가 아무리 베트남전쟁이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해도 정부에 대한 흑인의 기억이 그 말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가톨릭 사제들을 비롯한 다수의 종교인도 반전운동에 동참했다. 반전운동은 점점 격렬해져갔다. 처음 100명으로 시작했던 시위는 3년만에 200만명으로 늘었다.

      1973년 가을이 되자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제 승리는 미국 행정부의 눈앞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북베트남에 대한 최후의 폭격을 감행한 후 미국은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남베트남 정부는 여전히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미군 없이 북베트남의 침입을 막아낸다는 것을 불가능했다. 결국 베트남은 호치민의 공산주의 정권으로 통일됐다.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제국이 된 미국이 경험한 최초의 패배였다. 그 패배는 혁명을 위해 싸우는 베트남 농민군과 미국국민의 반전운동의 결과였다.

       

      (7) 놀라운 사건들

      1960년경에는 16세 이상의 여성들 가운데 3분의1이 넘는 사람들이 보수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령기의 자녀를 둔 여성의 겨우 2퍼센트만이 아이들을 보육학교에 맡겼으며, 여성들은 남성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받았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은 비현실적이고, 감정적이므로 어려운 사고를 할 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들은 민권 및 반전운동에서 자신들만의 모임을 갖고 여성 문제에 대한 행동을 취했다. 전국여성기구의 주도 하에 존슨 대통령에게 여성차별 금지를 요청했다. 또한 완전한 남녀평등을 보장하도록 헌법수정조항인 평등권 수정조항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법안 하나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여성운동이 미친 가장 심대한 효과는 ‘의식고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들은 성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열등함에 대한 거부, 자매애의 결속 등을 하게 됐다. 그러나 지식인이 아닌 대다수의 여성들의 경우에 굶주림과 고통,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것이 훨씬 시급한 것이었다. 여성 단체들은 여성들이 가사나 양육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받기를 원했다.

      사회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역할은 정부가 맡지 않았다. 대신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다. 남성이 여성을 통제했고, 여성은 자녀를 통제했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을 해방시키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외부에서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체제가 통제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에 반하여 가족끼리 한데 뭉쳐서 사회 자체의 변혁을 떠맡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때 인디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유일한 거주자였다. 그러나 백인 침입자들에 의해 밀려났다. 인디언들이 당한 최후의 학살은 1890년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 샛강 인근 파인리지에서 발생했다. 그 학살에서 300명의 인디언이 목숨을 잃었다. 인디언 부족들은 공격, 기아에 시달렸다. 연방정부는 그들을 여러 군데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나누어 추방했다. 정부는 법으로 보호구역을 철폐하고, 인디언들을 개인 소유지를 가진 미국식 농부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백인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이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호구역은 존속됐다. 한동안 인디언이 소멸하거나 백인 사회로 융합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오직 30만명에 불과한 인디언이 1960년 무렵에는 약80만명으로 증가했다. 그들 가운데 절반은 보호구역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전국 곡곡의 도시에 살았다.

      1960년대에 들어 민권 및 반전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인디언들 또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민했다. 인디언들은 조약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미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과 400건 이상의 조약에 서명을 했지만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인디언의 어업권은 박탈당했고, 인디언 구역에는 댐을 건설했다. 학교에서는 인디언 문화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1890년의 학살이 일어났던 운디드니 마을을 점령했다. 인디언의 권리와 땅에 대한 요구를 상징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만에 군대가 총알을 앞세워 제압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은 미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온 시기였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로워졌다. 동성애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고, 성별에 구분 없이 청바지를 입었다. 또한 사람들은 환경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람들은 화학약품이 공기, 물 땅을 오염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의회는 환경보호에 관한 일련의 법안들은 제정했다.

       

      (8) 1970년대: 이상무?

      1970년대 초 미국은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국가 체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국민 대부분은 대기업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특히 미국인은 정부와 정치체제에 관해 신뢰하지 않았는데,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이야기는 백악관에서 시작된다. 당시 대통령은 공화당의 리처드 M. 닉슨이었다. 선거가 시작된 11월,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재선을 위해 재선위원회를 결성했다. 1972년 6월 워싱턴 D.C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한 다섯 명의 남자가 체포됐다. 경찰은 침입자들이 사진촬영과 도청을 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재선위원회의 간부였다. 또 한 명은 리처드 닉슨의 변호사의 이름이 적힌 주소록이 있었다. 침입자들은 단순히 닉슨의 선거위원회와 행정부에서만 중책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CIA에도 줄이 닿아 있었다. 막을 사이도 없이 침입자들의 체포와 고위관계에 관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침입자의 관계 그리고 사전에 이를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닉슨 대통령은 백안관과 무관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진실이 밝혀졌다. 혐의를 피하기 위해 닉슨 행정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잇달아 입을 열었다. 그들은 법정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상원의 조사위원회에서, 그리고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 그들은 법무장관이자 미국 정부의 수석변호사의 비리를 폭로했다. 또한 닉슨의 수석보좌관들이 처벌 받았다. 닉슨 행정부가 저지른 범죄는 비단 워터게이트 사건만이 아니었다. 결국 닉슨은 사임하기에 이른다. 하원에서는 직권 남용의 혐의로 그를 공식적으로 고발하기 위해 탄핵을 결정할 투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탄핵이 이루어진다면 닉슨은 상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닉슨은 하원이 자신을 탄핵할 것도, 상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릴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닉슨 대통령의 사임은 미국의 체제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대기업과 막강한 주식회사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행정부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통령이 닉슨이건 포드건, 공화당원이건 민주당원이건 간에 미국의 체제는 항상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백안관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은 미국 정치체제의 한 단면이었고, 워터게이트 사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닉슨의 선거운동에 불법적인 후원금을 냈던 기업은 경미한 처벌만 받았다. 그들이 후원금으로 투자한 수백만 달러에 비하면 가벼운 벌금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많은 비밀이 밝혀졌다. 그 가운데 하나는 캄보디아에 관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에 캄보디아에 수천 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 사실을 미국의 국민뿐 아니라 의회에조차 숨겼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은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 상당 기간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 정계와 제계의 일부 고위 인사들은 국민이 해외에서의 다른 군사행동에도 반대할 것이 우려됐다. 미국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남기 위해 결단력을 증명할 수 있는 군사행동을 수행해야만 했다. 마침 강대국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해줄 기회가 왔다.

      미국 화물선 마야궤스 호가 캄보디아의 근해를 항해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인들은 그 배의 선원들을 본토로 데려갔다. 36시간 후 미국의 폭격기가 캄보디아 배에 폭탄을 퍼부었다. 해당 공격으로 41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폭격을 한 이유는 베트남이라는 난쟁이에게 패배당한 거인 미국이 여전히 강력하고 단호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세계에 그 위세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집권 세력이 있었다. 그 점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해당 공격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CIA와 FBI 모두 이미지가 훼손되었다. 이 단체들은 법을 어겼으며, 대통령의 불법행위를 도왔다. 언론은 이에 관해 언급을 피하고, 문제점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장려할 수 있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의회는 CIA와 FBI가 저지른 악행을 조사했다. 이런 일들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결과만 보면 그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은 불만이 가득했다. 당시 국민의 불만족은 경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국민은 일자리를 잃었고 실업수당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정치경제적으로 비관적인 현재 상황과 겹쳐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4.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1) 카터-레이건-부시: 양당 합의

      미국 의회는 미국의 정치적 전통의 유지에 힘썼다. 그 전통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20세기말 민주당과 공화당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았지만, 양당 모두 새로운 정책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을 좌파 성향, 진보주의 성향 쪽으로 미미하게 바꿔놓았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과 미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또한 베트남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즉 대통령이 되기 전의 지미 카터는 반전운동에 힘썼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에는 이란, 니카라과,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독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원조정책을 유지했다. 독재 정부는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탄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들에게 군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카터 대통령은 미국 체제에 대한 국민 신뢰를 회복시키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실패였다. 생필품 가격은 국민의 소득보다 빠르게 치솟았다. 특히 흑인 젊은이들 가운데 30%가 실직 상태였다.

      1980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지미 카터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빈민에 대한 복지를 삭감하고,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고, 국방예산을 늘리고, 연방법원을 보수적인 판사로 채웠다.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는 경제에 대한 관심이 노동자나 소비자에 대한 모든 관심을 압도했다. 실업은 계속 늘어갔다. 학교 무료급식이 사라져 가난한 아이들은 영양 부족에 빠졌다. 레이건 대통령 임기 동안 미국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국제정세에서 가장 극적인 발전이 조지 부시의 재임 초에 발생했다. 1989년 소련과 소련의 지배를 받은 동유럽 국가에서 독재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공산주의 정권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비(非)공산주의 계열의 정권이 들어섰다.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함께 민주주의 서독과 공산주의 동독을 가르는 장벽이 붕괴됐다. 주목할 점은 이런 일들이 국민의 요구에 의한 것이어서 내란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소련의 붕괴는 미국의 정치가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지켜낸다는 명분 아래 전 세계에서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예산으로 거두어들인 세금이 몇 조 달러에 달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위협이 사라진 것이었다. 미국이 새로운 대외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였다. 군사 예산에 투입되었던 수천억 달러의 비용도 건설적인 일에 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은 군사적 편제를 유기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당혹감에 빠졌다. 거대한 군사적 편제가 여전히 필요함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부시 행정부는 집권 4년 동안 두 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는 마누엘 노리에가가 독재하고 있던 국가 파나마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미국은 마누엘 노리에가의 통치를 묵인해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으나 마약상이라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이용가치가 없어졌던 것이다. 미국은 마약 범죄자를 법정에 세운다는 명분으로 파나마를 침공했다. 미군에 체포된 마누엘 노리에가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미국의 폭격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1만4천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두 번째는 중동에 위치한 이라크였다. 산유국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결정했다. 미국 국민은 쿠웨이트의 자유를 되찾아주고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하나는 중동의 석유에 관한 미국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치르는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조지 부시의 재선 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정부와 언론은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세뇌시켰다. 미국은 이라크 옆의 페르시아 마에 50만 병력을 파견했다. 조지 부시는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공습을 시작했다. 군사시설만을 정확하게 표적으로 삼는다는 ‘똑똑한 폭탄’은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된 수천명의 이라크 시민의 목숨을 빼앗았다. 전쟁은 6주간 계속됐다. 전쟁이 끝난 뒤 이라크에 대한 폭격으로 기아와 질병이 확산되고 수만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이용가치를 고려해 그의 권력을 빼앗지는 않았다. 이웃 국가인 이란이 중동 지역에서 세력이 강해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언론은 미국의 승리를 찬양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2) 보고되지 않은 저항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었던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쇼규모의 반핵운동이었지만 단호했다. 1980년대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막대한 군사 예산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반핵운동에 참여했다. 의사들은 핵무기가 인체에 끼칠 해로움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원자폭탄 제조에 참여했던 과학자들도 반핵운동에 힘을 실었다. 무기 경쟁의 종식을 주장하며 유례없던 대규모 집회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렸다.

      그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은 비단 무기 경쟁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레이건의 사회복지 감축에 분노에 찬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은 길거리로 나와 소방과 치안,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의 실패한 시스템과 국가의 군사정책을 연결지어 생각했다. 어린이에게 투자되었어야 할 자금이 무기에 소비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라틴계 사람들도 부장함에 맞서는 목소리를 냈다. 빈곤과 차별에 대한 라틴계 사람들의 투쟁은 파업, 불매운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미국인이 베트남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으며 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고된 교훈을 얻은 후 국민은 단지 지도층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전쟁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게 됐다. 조지 부시가 전쟁을 벌이려고 하자 역시나 항의가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되고 애국적인 말들이 언론을 장식하자 대부분의 미국인은 전쟁을 대놓고 반대하지 않게 됐지만, 아직 반전을 외치는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9일 후 15만이 넘는 사람들이 반전 연설을 들으며 워싱턴 D.C를 가로질러 행진했다. 이라크전쟁은 조시 부시가 국민들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지 5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콜럼버스와 동료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몰살했다. 500주년 기념제가 다가오면서 인디언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아메리카 대륙 각지의 인디언들은 기념제에 반대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의 에콰도르에 집결했다. 미국에서 콜럼버스 기념일을 축하하기 시작한 이래, 콜럼버스가 원주민을 남치하고 살해한 인물이라며 전국적 비난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콜럼버스에 대한 논쟁은 학교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전통적인 주류는 미국의 역사를 야만에 대한 유럽 문명의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에 크게 동요했다.

       

      (3) 다가오는 간수들의 반란

      책의 제목인 ‘민중의 역사’는 어떤 한 개인이 충족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또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작가가 이러한 제목을 붙인 것은 이 책에 정부의 역사를 무시와 민중들의 저항운동에 경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편향된 설명을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역사책이 정부를 존중하게 만들고 민중들의 운동은 무시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에는 반대의 경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위기의 순간이 나오면 반드시 민중을 구할 누군가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이라는 위기의 시절에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북전쟁 때에는 링컨이, 공황이 닥쳐왔을 루즈벨트가 민중을 구했다. 그러나 때때로 미국인들은 그런 관념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반란을 과소평가하고 정치가의 역할을 과대평가함으로써 시민들의 무력감을 조장한다. 그러나 민중의 저항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역사는 새로운 정의를 암시해준다.

      국민의 1%가 전체 부의 3분의1을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부는 99%의 국민이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분배된다. 앞으로의 혼란과 투쟁에서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99%의 국민에게 달렸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99% 가운데 자기 자신을 똑같이 궁핍한 계층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체제의 간수들과 죄수들 가운데 그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기존 체제는 점점 더 고립되고 무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체제의 죄수란, 과거부터 지금까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예상할 수 없는 방삭으로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킨 민중이다. 체제의 간수에는 가깝게는 책을 읽는 독자와 저자 그리고 멀게는 체제에서 혜택을 누린 중산층이 포함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실은 죄수들의 반란에 체제의 간수들이 결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민중의 선택이 결과를 좌우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4) 클린턴 시대

      빌 클린턴은 국가의 변화를 약속하며 희망과 함께 임기를 시작했다. 클린턴은 1996년 재선될 때에는 “새로운 세기를 위한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임 8년 동안 클린턴은 변화의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데 실패했다. 대신 전임 대통령들이 미국에 선사했던 고질적인 문제들을 심화시켜 놓았다. 그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지지표를 얻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그는 민주당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흑인,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지지를 잃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는 반면, 복지사업을 감축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정책을 택함으로써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얻었다.

      클린턴은 자신이 ‘법과 질서’와 관련해 강경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통령이 된 직후 클린턴은 중무장하고 있던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FBI 공격을 승인했다. 하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고 클린턴 역시 열렬히 지지한 범죄 법안은 범죄문제에 대해 예방이 아니라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사형을 모든 종류의 형사범죄로 확대시켰으며 교도소 신축에 80억 달러를 할당했다. 클린턴을 포함한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모종의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국민의 분노의 화살을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집단들에 돌렸다.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집단에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정치가들은 미국 체제의 실패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세계 인구의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자의 30%를 소비했다. 그러나 미국인들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국가의 엄청난 부의 혜택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1조 달러 이상을 벌어들여 국부의 40% 이상을 소유하게 됐다. 1982~1995년 사이 최상층 가문들의 재산은 920억 달러에서 4,800억 달러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동안 생활비는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보다 빠른 속도로 올랐고, 평균 임금을 받는 국민의 구매력은 15% 정도 감소했다. 최상층에만 주목한다면 미국 경제는 안정적이다. 그러나 4천만에 달하는 사람들은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어느 산업국가보다도 더 많은 미국의 아이들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1998년 전체 노동자의 3분의1이 빈곤 한계선을 넘을 정도의 수입을 얻지 못했다.

      빈곤, 실업 등의 국가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들에 쓰일 자금은 군사 예산 감축과 최상층에 대한 부유세로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해마다 5천억 달러씩을 건강보험이나 취업 시장에 쓰이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예전과 다름없이 돌아갔다. 농부들은 빚 때문에 토지를 내놓아야 했다. 젊은이들은 마약과 범죄에 빠져들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감옥을 더 많이 지어서 사람들을 더 많이 수감시키는 것이었다.

      클린턴의 임기 동안 많은 미국인이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 그들은 정부가 빈민들과 집 없는 사람들을 돕고, 군사 예산을 감축하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다른 시위자들은 자유무역을 통한 대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가 희생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시위자들은 부유한 자들의 모임이 열리는 곳마다 나타났다. 거대 조직들은 환경이나 노동조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5) 2000년 선거와 ‘테러와의 전쟁’

      8년간 부통령으로 클린턴을 보좌한 앨버트고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공화당은 텍사스 주지사 조시 부시 2세를 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사람들은 두 후보자 모두 서민들에 대해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후보 모두 거대한 군대를 선호했으며 지뢰를 계속해서 사용하려 했다. 다른 나라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이 끔찍한 폭약을 금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사형 제도와 교도소의 증설을 지지했다. 또한 까다롭지 않은 건강보험 제도 수립, 저렴한 주택 보급의 현저한 증가, 환경 조절의 극적인 변화 따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선거일이 되었고, 미국 역사에서 가장 희한한 일이 발생했다. 앨 고어가 부시보다 수십만 표를 더 많이 획득했지만, 헌법의 규정에 따르면 최후의 승자는 각 주의 선거인단에 의해 결정되게 되어 있었다. 선거인단 투표는 박빙을 달렸고 결국 플로리다 주의 결과에 따라 당선을 판가름하게 됐다. 플로리다에서 다수표를 특표하는 후봊가 주 선거인단 표를 전부 획득하게 되어 대통령에 오르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부시와 고어 가운데 어느 쪽이 플로리다에서 다수표를 얻는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개표과정에서 많은 표가 누락된 것처럼 보였으며, 특히 다수의 흑인 유권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러했다.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표가 무효처리가 됐는데, 검표기가 투표용지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거인단의 투표는 어느 한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조지 부시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의 동생은 플로리다의 주지사였고, 다수 득표자를 인증하고 공표할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조지 부시를 플로리다의 승자로 발표했고, 이로써 조지 부시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민주당은 플로리다 법원과 연방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시 집권 9개월째인 2001년 9월 11일, 국내외의 모든 문제들이 묻힐 정도로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3대의 비행깅 탑승한 공중납치범들이 연로가 가득한 대형 제트기를 몰고 뉴욕 도심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 D.C의 펜타곤으로 돌진했다. 전 미국인들은 쌍둥이 빌딩이 콘크리트와 철골의 지옥 속에서 붕괴되는 장면을 지켜보며 경악했다. 국민들은 수천명의 노동자와 그들을 구조하러 들어간 소방관과 경찰고나 수백 명이 폐허 속에 묻히는 모습을 공포에 질린 채 지켜봤다. 자신들이 적으로 생각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미국에 대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버렸다. 부시는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정부는 911테러가 이슬람 세력의 군사력을 지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사마 빈 라덴의 지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은닉하고 있는 그를 향해 조지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에 폭격 명령을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을 생포하거나 살해하고 그가 주도하는 이슬람 군사조직 아카에다를 괴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가 무력으로 격퇴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나라들과 여러 시대에 걸쳐 나온 증거들은 국가가 테러행위에 군사력으로 대응했을 때에는 더 큰 테러라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쟁 분위기 속에서 국민이 정부의 행위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911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대통령에게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 것과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폭격을 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폭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테러가 미국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에 근거한 것이며 따라서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반감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감의 해결을 위해 미국은 세계 여러 곳에 주둔 중인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나라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도 포기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화당이나 민주당 모두 수용이 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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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국과 프랑스가 지리적 영역을 확대하면서 벌어진 전쟁으로 유럽의 열강이 모두 참여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및 인도를 둘러싸고 주로 식민지에서 패권경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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