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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뉴스 클리핑

2019년 2월 3주차 뉴스클리핑

by chocolatebox 201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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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양이들에게 맡긴 ‘예타 면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는 김대중 정권 때 ‘타당성 조사’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다. 타당성 조사를 사업 주무 부처가 주관하다 보니 객관성과 신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타는 예산당국이 경제성과 정책적 고려 등을 분석해 성공 여부를 먼저 판단하는 절차다. 두 조사의 목적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국민들이 모아 준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예타를 면제하는 23개 사업을 발표했다. 이번 정권이 예타를 면제한 사업규모(53조7000억 원)는 박근혜 정권(23조 원)보다 많고, 이명박 정권(60조 원)에 육박하고 있다. 예타 예외 조항 총 10개 중 마지막에 ‘지역 균형 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추진이 필요한 사업으로 사업계획이 수립돼 있고 국무회의를 거친 사업’이라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최소 24조 원이 들 사업을 추진하며 ‘지역균형 발전’만 얘기하고, 추진하는 사업이 지역균형 발전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예타 면제 조항은 이명박 정권 당시 지역균형 발전 등의 조건이 들어가면서 10가지로 늘었다. 그 결과 4대강 사업이 예타 면제를 받고 추진됐다. 예타를 거쳐서 사업을 수행해도 수요 예측 실패 등으로 세금이 낭비된다. 인프라 건설 사업은 후세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예타조차 거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식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과 진배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예타 면제 사업을 사실상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는 상태고, 이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지역구 이익 때문에 부화뇌동 중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서 생선을 고양이들에게 맡긴 꼴이다. 자식들이 세금 폭탄을 맞을 위험도 더 커지고 있다.

2. ‘뭔가를 하지 않겠다’는 고르바초프의 결단

가끔은 ‘뭔가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위대한 공헌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1985년 소련 군산복합체 세력들은 미국의 ‘스타워즈’ 구상에 맞서는 독자적 스타워즈 구축을 호소했다. 레이저 무기를 우주에 올려두고 지상의 항공기나 미사일을 격추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미국 미사일방어에 대응하기 위해 더 많은 미사일과 핵탄두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제안됐다. 미사일 1기당 10기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SS-18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량해 사거리를 줄이면 1기당 38기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왔다. 이를 수용했다면 두 초강대국은 냉전의 궤적을 지속할 터였다. 이때 고르바초프는 대규모 무기 경쟁을 하지 않았다. 군비 경쟁에 따른 경제 파탄을 지속하지 않기 위해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때론 퇴보하기도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러시아의 조약 불이행을 이유로 INF 탈퇴 선언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복귀할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조약 불이행 외에도 핵전력을 증강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지상발사용 중·단거리 미사일 체계의 개발 및 배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신무기 개발 위협, 중국의 선제 핵사용 금지 원칙 폐기 등 군비 경쟁이 시작되려 한다. INF 탈퇴 문제로 군비 경쟁의 기로에 선 지금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뭔가를 하지 않겠다’ 정신이 아닐까 싶다.

3. [이국종 기고] “윤한덕의 ‘고통’을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았다”

2008년 나는 보건복지부 회의실에서 영국의 중증외상환자 치료 체계에 대해 발표했다. 외상센터 설립과 함께 헬리콥터를 이용한 항공의료 체계를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응급의료인 대부분이 반대했다. 그러나 윤한덕 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내가 내민 영·미권에서 출간된 외상학 교과서들과 런던에서 가지고 온 자료들을 세밀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선진국에서 보편화하여 있는 “교과서적인 프로토콜”을 알고자 애썼다. 한국에서 생산될 수 있는 중증외상환자 자료라는 것들의 수준이 그저 현실의 참상을 확인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최선을 다해서 한국 응급의료의 중증외상환자 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나섰다. 그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였다. 해마다 배출되는 3000여명이 훨씬 넘는 의사 중 극소수만이 응급의료 계통에 뛰어든다. 전공의 수련 기간 중 외과계 중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죽어 나가는 모습을 너무 많이, 지겹게 봐왔다고 했다. 윤한덕은 그때의 응급실을 ‘지옥’ 그 자체로 기억하고 있었다. 20여년이 훨씬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응급실 문제들이 해결에 난항을 보인다는 사실에 그는 괴로워했다. 지옥을 헤매본 사람은 도망치거나 순응하거나, 판을 뒤집는 것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선택은 무모하다. 그런데도 윤한덕은 셋 중 마지막을 택했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를 맡아 전국 응급의료의 수준을 끌어올리려했다. 그는 스스로 보건복지부의 산하기관인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자신을 묻으며 출세에는 무심한 채 응급의료 업무만을 보고 살았다. 윤한덕은 임상 의사로서 응급의료를 실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응급의료 현장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경중과 화급을 잘 구별하여, 보건복지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해왔다. 과정에서 의료계와 정부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갈등구조 속에서도 평정심을 잘 유지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뛰어난 행정가였다. 위기 때마다 자신의 목을 걸어놓고 배수의 진까지 치고 달려드는 그 특유의 해결방식 덕에 한국의 응급의료 전반은 손톱 끝만큼씩이라도 개선되어 나갈 수 있었다. 1년이 멀다 하고 보건복지부의 담당자들이 바뀌며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국립의료원장이 바뀌거나, 국회의 다수당이 바뀌거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며 쏟아져 내려오는 각기 다른 정책적 포커스 속에서도 그는 자기 자리를 지켰다. 현재 대한민국 응급의료체계 어느 곳에도 윤한덕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부분은 없다. 우리는 윤한덕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서 응급의료의 구석구석까지 들여다보며 그 수준을 끌어 올리고자 했지만 그의 눈높이에 맞게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윤한덕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이 다투어 그의 공을 치하하고 개선책을 결의에 찬 모습으로 발표하고 있는것을 보고 들으며 난 기가 막혔다. 지금 앞다투어 발표하는 그 결연한 계획들의 10분의 1이라도 몇 달 전에 집행해 주었으면 윤한덕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다. 어차피 윤한덕이 떠나간 사실도 며칠 뒤면 언론에서 사라질 것이고 쏟아져 나왔던 각종 대책 및 결연한 ‘결심’들도 곧 날아갈 것이다.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영웅을 잃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심 없이 스스로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온갖 슬픔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최후까지 피투성이 싸움을 하다가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공간에서 단단하게 앉은 채 세상을 떠나갔다. 세상을 떠날 때조차 그는 한가하게 누워서 쉬지 않았고, 그는 응급의료체계 개선안에 대한 서류들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함께 가지고 갔다.

4.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한국 학생들 중에서 북한이 50년대 말부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천해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알 만큼 아는 교양이 풍부한 우수 학생들이, 북한사에 대해서만은 북맹(북한을 잘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 북한사의 긍정적인 부분들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안 나오고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아 그렇게 된 일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북한 관련 정보가 국가적으로 더 이상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서 한글이 아니면 영문으로라도 원하기만 하면 북한 복지체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 통제나 제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관심의 축, 그리고 한국에서의 앎의 지형이다. 한국에서 잘 모르는 것이 꼭 북한만도 아니다. 한국은 분명히 지리적으로 아시아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먹여살린다는 수출의 대부분 역시 아시아로 향한다. 또한 국내 체류 외국인들의 대다수는 외국 국적의 해외 동포들을 포함한 아시아 출신이며(중국 46.7% 등) 유럽과 북미 출신은 10%도 안 된다. 말하자면 인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의 ‘몸’은 아시아에 있지만 ‘머리’는 따로 논다. 한국인들은 교양상 구미권에 대해 내면화한다. 그 내면화 과정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 한국 학교에서 소수만이 선택하는 세계사의 내용은 구미 역사 이외에는 주로 중국 등 일부의 동아시아사만 포함된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은 한국으로서는 대미교역보다 비중이 더 크지만,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언급 이상은 없다. 한국에는 숙명적으로 가장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겠지만, 중국 근현대 문학은 학교의 어느 과목에도 속해 있지 않다. 언론들도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의 유포에 한몫 한다. 한국의 중앙 일간지들의 해외특파원 중의 대다수는 미국과 유럽에 상주해 있으며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에만 몰려 있다. 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언론들은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 대한 보도를 영어권 주류 언론에 의존한다. 영미권 통신사나 언론의 기사를 번역한 것 이외에는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등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 투자나 한류의 확산 등 자국 중심의 소식들만 보인다. 보도 행태로만 보면 한국에 아시아는 경제적 이용물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충분히 주고도 남는다. 반대로 구미권으로부터의 보도들은 현지의 문학, 연예, 사상 동향까지 포함한다. 한국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철저한 내면화의 결과로 구미권은 ‘보편’이 돼도 나머지 세계는 그야말로 전문가들만 관심을 갖는 ‘특수’에 속한다. 구미가 ‘보편’이 되어 버린 만큼 한국에 맞지도 않고 그다지 긍정적인 효과도 없는 담론들도 구미의 ‘새로운 진리’라면 당장에 국내에서도 유행을 탄다. 한국 사회에는 차라리 ‘자유시장’의 결점과 재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 신좌파들의 경제 구상이 더 적절하겠지만, 한국 대학의 경제학과들은 정통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메워져 있다. 4분의 1의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신음하고 3분의 1이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기본적 직장 안정성이나 사회적 권리들도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임금착취나 노동배제의 정치학이 연구 대상이 돼야 하는데, 계급론적 접근이 더 이상 구미지역에서 유행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외면을 당해왔다. 한국보다 더 가난한 아시아 나라들은 이미 서구화된 한국이 ‘개발’해 주어야 하거나 경제적으로 이용해도 되는 단순한 대상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북한과의 통일을 ‘북한의 자원과 저임금 인력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이것이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한국 복제판이 아니면 과연 무엇인가? 한국이 북한과 평등한 통일을 이루고 아시아 이주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되자면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5. ‘높으신 분’ 없는 세상을 위하여!

노르웨이 총리나 장관 등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거나 어느 지역 내지 현장을 방문하여 주민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뉴스도 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사람으로 간주되어 일반인과 평등하게 한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이야기할 때, 학생들은 이런 관습이 고대와 중세의 군주 순행 의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 속의 권위의식·권위주의는 단순히 과거의 유습만은 아니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긴 하지만, 과거의 결정력은 전혀 절대적이지 않다. 오늘날 왕족이나 내각 각료가 자전거를 당연하게 타고 다니는, 평등의식이 철저한 덴마크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는 귀족은 그 농노에게 체벌을 가하여 때려죽이는 경우까지 적지 않게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 청산에 있어서의 실패를 단순히 ‘과거 탓’으로 돌리기가 힘들 것이다. 권위주의의 온존과 지속은 결국 현실적 권력집중과 비민주성을 반영할 뿐이다. 한국 대통령이 노르웨이 총리와 달리 일반인과 신분이 다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은 대통령이 쥐고 있는 엄청난 권력이다. 한국에서는 전문성보다 ‘정치적 판단’, 즉 통치권자의 권력행사가 앞선다. 대통령이 직간접으로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 포함하면 1만개 이상 될 것이니 온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제왕적 권력이라 하겠다. 이 정도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시민’의 한명으로 간주하여 평등하게 대하기 어렵다. 권력은 현재 인류 문명의 필요악이다. 궁극적으로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들고 서열화시키는 권력이라는 독소는 불가피하게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은 권력의 분산과 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다. 만약 대기업의 경영에 노동자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각종 불법, 갑질들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치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사회의 민주화와 각종 사회적 관계들의 평등화다. ‘높으신 분’들의 군림이 없고 각자 직분은 달라도 ‘신분 차이’처럼 돼버린 경직된 위계성이 없는 나라야말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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