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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백범일지를 통해 보는 김구의 리더십과 본받을 점

by chocolatebox 2019.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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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를 통해 보는 사회변동과 리더십

 

 

 

김구『백범일지』도진순 주해돌베개, 2002 -

 

 

 

목차
I.     여는 글
1.   구성에 대하여
2.  저자 및 도서 소개
 
II.    21세의 청년이 본 백범
1.  줄거리
2.  나의 생각
3.  배울 점
 
III.   25세의 청년이 본 백범
1.  백범일지 요약
2.  백범의 리더십
3.  인상 깊은 구절
4.  감상 및 자기 반성
 
IV.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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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여는 글

 

1.  요약서의 구성에 대하여

이 글은『백범일지』에 관하여 2013년에 작성한 독후감과 2018년에 작성한 요약서를 합한 것이다부득이하게 시간이 부족하여 요약서를 읽기 곤란한 독자는 대목차 Ⅱ번 21세의 청년이 본 백범’까지 읽을 것을 제안한다하지만 대목차 Ⅲ번 25세의 청년이 본 백범’도 읽기를 간절하게 바란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왜냐하면 4 6개월 동안 필자가 독서를 하는 방식이나 글을 쓰는 방식에서 분명 진일보하였는 지에 대한 좋은 판단 기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또한 책의 목차에 따라 요약서를 작성하기 보다는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건을 통해 백범이라는 인물의 생각을 공유하고사회 변동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한다백범이 독립운동에 초지일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한 백범의 리더십은 무어라 한 가지를 꼬집어 말할 수 없다백범은 일대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격동과 혼란의 시대에 태어나 다양한 사상을 맛보았다하지만 받아들임에는 신중해서 먼저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여나라와 민족에 이로운 것은 선택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그의 리더십은 오직 백범만의 사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2.  저자 및 도서 소개

백범 김구(18761949)는 흔히 독립운동가정치지도자자주통일운동가민족주의자인류평화 운동가그리고 혁명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백범이 걸어온 길이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로부터 독립을광복 이후에는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 노력해왔다동학군의 접주에서 출발하여 임시정부의 주석으로광복 이후에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로서 그가 한국 근대사에 남긴 족적은 민족의 당면한 과제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그의 일생은 독립과 통일이라는 민족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힘써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독립과 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백범이 교육문화운동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백범의 실천은 무엇보다도 교육문화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백범은 청소년기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도 교육문화운동을 통해서 계몽과 구국운동을 펼쳤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그는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본격적인 교육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이 직접 세운 학교나 독립운동 동지들이 세운 학교와 사범강습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특히 신민회 시기에는 황해도 학무총감을 맡아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각종 연설회나 강연회환등회를 통해 국민의식 개조구국계몽을 위한 교육을 실시한 바도 있다그에게 교육받은 제자들이 훗날 독립운동의 일선에 서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 요인으로 활동하였고광복 이후에는 학교 교사나 정치가로서 건국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1]

백범은 조국의 장기분단과 내전을 막고 조국통일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1948 4월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다회의에 참석하여 남북협상을 추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48 8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단독 정부로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 9일 단독정부로서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집에서 칩거하였다. 1949 6 26일 친일 매국노의 잔당들과 일부 권력 추구배들이 음모를 꾸며하수인 안두희를 고용하여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을 시해하였다이렇게 하여 일생을 모두 자기 민족과 조국에 모두 바친 위대한 애국자이며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 김구 선생은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2]

『백범일지』는 간단히 말해서 김구의 자서전이다김구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직후인 1928 3월에 상권을주석으로 선출된 이듬해인 1941년에 하권을 집필하기 시작했다해방 후인 1947년에 ‘나의 소원’을 더 첨부하여 출간본으로 발행됨으로써 『백범일지』가 대중적으로 읽힐 수 있었다최초의 『백범일지』는 국한문 혼용의 김구 친필로 기록되었으며출간본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여러 번의 첨삭과 수정이 이루어졌다이후에도 『백범일지』는 여러 사람에 의해 재번역되었다.[3]

김구는 「백범 출간사」에서 상권의 집필 목적을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고국에 있는 어린 두 아들에게 자신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다상권을 통해 백범은 두 아들이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 하였다반면에 하권은 백범이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또한 윤봉길 의사 사건 이후 더욱 어려워진 독립운동으로 인하여목숨이 다하기 전에 미주와 하와이 등에 있는 동포를 대상으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유서로도 볼 수 있다그리고 끝에 붙인 「나의 소원」은 백범이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종합하자면 『백범일지』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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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21세의 청년이 본 백범

 

1.  줄거리

조선 말에 황해도 해주 김순영씨 댁에서 태어난 김창암그가 그토록 큰 인물이 될 거라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또래와 달리 특출 났다신분이 상놈은 집안의 사정을 듣고 그는 과거에 급제해 집안의 기둥을 세우겠다며 공부를 시작했다서당의 공부의 수준에 회의를 느낀 그는 독학으로 성리학과 병서에 대해 공부하였다과거에 응시하였으나매관매직과 같은 부정행위가 판치는 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스무 살도 안 된 김창암은 동학에 입도하며 창수로 개명하여군대를 훈련시켜 동학군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동학 운동을 실패하고 방황하던 그는 치하포에서 국모를 실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 일본인을 살해하고 인천감옥에 투옥된다고종 덕에 교수형은 면한 그는 수년 후 탈옥하여 절로 대피하여 출가한다유완무의 권유로 이름을 구()로 개명하여 장수를 기원했다한일의정서가 조인되면서 구국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서른 살이 넘어서는 신민회를 창단하여 많은 독립투사를 지원했다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죄로 김구는 서대문감옥에서 15년 형을 받았다하지만 일본에 상이 있어 형이 5년까지 감형되었다이 기간 동안 그는 이름을 구()로 호를 백범으로 개명했다.

 

3.1운동 이후에 상해로 명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초대 내각을 발표하여 현 정부의 근간을 세웠다상해에서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원을 하여 국외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노력했다이봉창 의사와 윤봉길을 지원하였다는 사건의 주모자가 김구임이 드러나며 그의 안위가 위태로워졌다결국 상해를 탈출하여 광동 등 여러 곳을 방황하며 민족운동을 지속했다광복군을 창설하여 전투에 참전하여 대한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리려던 임시정부의 시도는 왜적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물 건너 가버렸다산전수전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남한을 순환하며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끝난다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소원이라는 부분에선 김구가 꿈꾸는 이상적인 대한민국과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마무리된다.

 

2.  나의 생각

백범일지는 초등학교때 필독 도서라 다들 읽어 봤을 책이지만어릴 때 본인은 독서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었기에 읽지 못하고 최근에 와서야 읽었다상권과 하권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상권인 자신인 신과 인을 위해하권은 이 책을 발매하기 위해서 독자인 국민들을 위해 작성되었다중간중간 역사적인 현장이 나와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책 전체에 아들을 위해 쓴 책인 만큼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 것이다물론 책에 서술된 내용 중에는 굳이 자식에게 전할 만한 내용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사건도 있었지만확실히 김구는 그 책을 통해 아들들이 올바르고 정직한 가치관을 가지고 대쪽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다는 게 느껴졌다하지만 글의 구성 면에서는 그다지 좋은 글은 아니었다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긴 하였으나역사서로 보기엔 정확도가 떨어지고 수필로 보기에는 작가 본인의 생각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어중간한 글에 별점 5점을 주고 싶다이유는 김구 본인은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동안 작성한 그 글을 통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진 못 했던 과거가 아쉬웠을 것이다하지만 글 어디에서도 문체에 후회는 한 점도 없었다오히려 떳떳함과 기개가 느껴졌다그 누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토록 당당하겠는가.

 

 백범은 강인한 민족투사라는 것만 알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그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그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했고함께한 자들과 김구는 언제나 신의를 나누며 서로를 굳게 신뢰했다책에서 김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웃었다그것도 쾌활하게타인과의 소통이 적어 바로 옆에서 몇 년간 함께 해온 동료와도 속마음을 나누지 않는 요즘과는 달리 그는 톡 까놓고 이야기했다각종 범죄에 연루되고 쫓기는 삶에서 고독을 느끼지 않았던 건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라는 것이 그의 원동력인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정말 부러운 삶을 살았다.

 

3.  배울 점

1)  언제나 계몽된 의식으로 좀 더 나은 내가 되려고 노력하자.

2)  타인에게 신의를 주는 사람이 되자.

3)  가슴엔 언제나 불같은 이상을 품고 단련시키자.

 

 

III.         25세의 청년이 본 백범

 

1.  백범일지 요약[5]

1)  유년 및 청소년기 (1876~1892)

백범 김구는 1876(고종13음력7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씨와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백범의 첫 이름은 창암이고 본관은 안동이었다백범의 성품은 어렸을 적부터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아서의협심이 매우 강하고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다백범은 9세에 국문을 배워 이야기책을 읽을 줄 알았고 이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천자문도 배워 사람들의 이름을 쓸 정도의 공부를 자습으로 달성하였다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어 집안을 양반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이다백범이 17세 때인 1892년에 진사시험을 보러 갔지만 온통 부정인 과거 시험에서 극단적인 비관을 품고 돌아온 백범은 아무리 글공부를 잘해도 양반이 되기는 틀린 세상인 것을 깨달았다백범은 관상학을 공부하였으나 자신의 외모에 낙심하여좋은 외모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하였다.

 

2)  동학의병운동기 (1892~1900)

이 무렵 동학이 황해도에 포교되어 백범이 오응선이라는 대접주를 찾아가 그의 강론을 듣고 동학의 평등주의에 매혹되어 동학에 입도하였다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그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6] 이후 동학경전 공부를 하고 포덕에도 힘써 불과 몇 개월 만에 연비[7]가 수백 명에 달해 애기 접주[8]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894년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접주라는 첩지를 받아 황해도 동학당의 중요한 간부로 공인되었다백범 김구의 최초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이렇게 동학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었다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실패했으나 백범은 동학을 통해서 양반의 허위와 평민의 중요함나아가 평등사상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 평생토록 이를 간직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백범이 동학접주로 활약할 당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대를 편성한 황해도 일대의 이름 높은 문사 안태훈과의 밀약을 맺게 되었다. 1895년 청계동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니 안진사가 그를 매우 반기어 백범의 부모도 청계동으로 모셔오게 했다백범은 안태훈의 사랑방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성리학의 요체를 배웠으며 인간의 도리의 결정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또한 고능선은 당시 나라의 과제에 대한 위정척사사상의 대응 양식을 정당한 것으로서 일깨워 주었다백범은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능선으로부터 유학과 위정척사사상의 강의를 듣고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그는 후에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을 때도 이 때 청강한 의리의 귀중함을 평생토록 지키면서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에 항상 감사하였다백범은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고 구국의 길을 탐색하기 위해 1895년 안태훈의 집을 떠나 청국으로 향하였다.

 

백범은 1895년 여름김형진이라는 참빗장수 동지와 함께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북경을 최종목적지로 하여 만주로 향하였다때는 일본군과 일본 낭인배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일어났다이후 국내에 들어와 가족과 상봉한 후 다시 청국에 가려고 안주에 도착했을 때 치하포의 객주집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있던 일본군 중위 쓰찌다를 처단하여 체포되었다이 사건에서 김구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능선 선생이 가르친‘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는 구절을 되새기며죽음을 불사하는 결심을 내리고 마음먹은 바를 실행에 옮긴다고선생은 김구가 결단력이 부족한 점을 보완하라는 의미에서 해당 구절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김구는 선생의 가르침을 체득했다고 볼 수 있다.[9]

 

인천감리영 감옥에서 심문을 마치고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에 옥중에서 감리서에 다니는 젊은 관리가 넣어 준 국한문으로 번역된 한국 개화서적을 읽었다백범은 책을 읽는 동안 서양이 무엇이며오늘날의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옛 사상과 옛 지식으로 위정척사만을 주창하는 것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범은 널리 세계의 정치·문화·과학 등을 연구해서 좋은 것은 받아들여 근대적 실력을 길러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사형판결을 받지만 죄명이 국모보수인 것을 보고 고종황제의 특사령이 내려 사형을 면하게 되었지만 일본인의 간섭으로 석방이 되지 않자 탈옥하게 되었다.

 

3)  안악신민회 시기 (1900~1919)

백범은 고향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1900(25)에는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아이들을 모아 교육과 계몽활동을 하였고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이때 이름을 ‘거북 구()’자의 金龜로 바꾸었다.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하고 장연동 사직동으로 이사하여 이 곳에서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이를 백남훈에게 인계한 후 공립학교의 교사가 되어 신교육활동을 하였고 1904년 기독교 신자인 최준례와 결혼하게 되었다이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준비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한국에 대규모 병력을 불법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1905 ‘을사 5조약’이라는 국권침탈조약의 체결을 강요해 왔으며 일제는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이라는 이름으로 반식민지로 점령했다가 완전식민지로 강점하려 한 것이다.

 

이때 백범은 신교육을 실행하는 교사와 교회 청년회 총무로서 일을 하고 있다가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여기서 ‘을사 5조약’에 반대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과 충돌하고 무력에 의해 해산을 강요당했다이때 을사 5조약에 대한 항의로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이상설의 자살미수한 광경을 보게 된다상동교회에 모인 전국 기독교 대표들은 상소운동이 별효과가 없음을 알고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국민들에게 강렬한 애국 교육과 신교육을 실시하여 국권을 회복할 민족 실력을 양성하기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그가 교육에 힘쓴 이유는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 또는 애국사상이 빈약한 민중과 함께 어떠한 일도 실효성 있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0] 백범은 황해도 일대에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고향인 해주 서촌에서 그는 낙담하게 된다백범이 주장하는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인재를 양성하여 장래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어약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어둠에서 광명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주 서촌의 양반들은 자기네가 충신 자손이니 공신 자손이니 하며온갖 못된 위세를 부리던 기염을 상실하였고상놈들은 신분제도 하에서 양반에게 유린된 삶에서 벗어나 재래의 썩은 양반보다 신선한 신식 양반이 되려는 마음조차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이후에 백범은 1907년 전국규모와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이 되었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며 해외에 독립군양성을 위한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려고 준비한 전투적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백범은 황해도 책임자로서 목숨을 걸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가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수개월간 체포되다 불기소 방면되었다이 후 1910년 신민회 전국간부회의에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해외독립군 창설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 결정되어 백범은 신민회의 방침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다 ‘안악 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받는다이 때 감옥에서 1913년 호를 ‘백범’으로 이름을 金九로 바꾸었다백범일지에서 개명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것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12]

 

백범은 1914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었고 김홍량이 소유한 황해도 재령 동산평 농장에서 관리직으로 소작농들에게 농민계몽을 하다 1919 3·1운동을 맞게 된다.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1919~1945)

백범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감시하는 일본 헌병을 따돌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백범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4 11일 성립되어 각료조직과 선포가 이미 끝난 후였다백범이 4 23일에 열린 의정원회의에 출석한 의원명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상해에 도착해서 임시정부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9 8 12일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어 4년간 이 직책을 담당하였다경무국의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일본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13]

 

임시정부의 형편은 성립초기에는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이 참가하고 봉대하여 크게 융성 했으나 1921년부터 서서히 좌·우분열의 조짐을 보이더니 1923 1월부터는 격화되었다공산주의 측에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민주주의혁명에 불과하므로 이렇게 독립을 한다면 또다시 공산혁명을 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라는 입장이었다그러나 백범은 독립운동이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이므로 독자적인 공산혁명이 불가능한 이상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4] 백범이 공산주의자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보인 결정적인 계기는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은 유혈사업이니 한 번은 가능하며 민족운동 성공 후에 또다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반대하였으나러시아의 레닌이 “식민지 민족은 민족운동을 먼저 하고 사회운동은 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자그들이 주저 없이 민족운동을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백범은 이러한 변화즉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1단계 혁명론에서 민족해방을 중시하는 2단계 혁명론으로의 전환이 레닌의 지적에 무조건 따른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백범이 보기에는 조선의 양반 노인들의 교조적인 성리학 신봉이나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 둘 다 사대주의의 일종으로서 비판의 대상인 것이다[15]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통일과 강화를 위하여 모든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1923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승진하고 결국 임시정부에 대해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고 창조파들은 새로운 임시정부 ‘조선 공화국’수립을 선포하였다애석하게도 1924년에는 둘째 출산 후 아내가 계단에서 넘어져 생긴 폐렴으로 사망했다.

 

임시정부의 내분이 계속되어 1925 3월 의정원은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고 박은식을 2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의정원은 이어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다. 1925 9월 국무령에는 서로군정서 총재를 지낸 이상룡이 취임했으나 조각에 실패하였고 1926 2월 양기탁,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취임을 모두 거절하여 1926 7월 홍진을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단명내각으로 끝났다이에 의정원에서 백범을 1926년 국무령으로 선출하였다백범은 국무령에 오르자 임시정부의 분열과 내각교체가 거듭하는 것은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지도력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헌했다.

 

임시정부가 약화되어 백범을 중심으로 이를 지키려는 분투가 전개되고 있던 중 일제는 한·중 양 민족을 이간시키기 위해 공작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 한·중 양 민족의 연대는 완전히 깨어지고 전 중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 행동이 만연되었다당시 한국 민족의 국외 독립운동의 가장 큰 부분이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런 상태에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백범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미국과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및 파괴운동을 실행할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16] 이봉창 의사의 의거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민족 독립운동을 크게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민족을 감격케 하였다만보산 사건으로 말미암은 중국인의 악감정은 사라지고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에 협조적이게 되었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도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운동에 원조를 시작하였고 미국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도 임시정부의 활동을 재인식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였다백범은 한인애국단 활동의 성공후에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확실한 지도력을 확립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임시정부는 강소성 진강장사광주남해유주기강을 거쳐 중경에 이르게 되었다백범은 민족주의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 통합추진회의를 하다가평소 김구에게 불만이 있던 이운환에 의해 총상을 입게 되었다이 후 중경에서 어머니 곽낙원여사를 여의게 되었다또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로 연합한 후 좌파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인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협동전선을 성립시키려다 실패했다.  독립운동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족주의 정당만이라도 통합하려 추진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 여당으로 되고 제32회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제를 폐지하고 ‘주석제’를 채택하였다.

 

1940 9월 임시정부의 직할 무력으로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1 12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대일선전포고」를 공표하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에의 확전에 응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국제적인 연대를 강화하려 하였다백범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을 내다보고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1942년 광복군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의 합병안을 결의하여 제1지대2지대3지대로 편성·강화하여 역사적인 군사통일이 달성되었다. 1943 12월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이 유일하게 공식 약속되어 선언되었다. 1944 4월 헌법을 개정하여 주석이외의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 수를 증원하여 한국 독립당 국무위원조선민족혁명당 국무위원조선 민족해방동맹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서 국무위원으로 입각시켜 정부의 통일도 실현한 것이었다백범은 광복군과 연합군과의 합동작전을 적극 추진하였다영국군과의 군사협정의 체결미국 전략정보처와 한국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비밀훈련을 실시하여 조국해방을 위해 국내에 진입할 모든 준비를 끝내고 19458월 서안으로 광복군의 제1진을 국내 진입시키려고 시찰하는 도중 일제가 항복하게 되었다백범은 일제의 항복이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심정을 밝혔다수년 동안 애를 써서 준비한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지 못해서 한국민족의 국제간의 발언권이 약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미국무성에서는 ‘미국 군정부의 지배를 인정하고군정이 끝날 때까지 정부로서 행사하지 않으며군정의 법과 규칙을 준수할 것에 동의’하는 서약을 김구가 받아들인 후 입국 허가를 내주었다.[17]

 

 

5)  건국통일운동기 (1945~1949)

귀국한 이후 김구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각종 강연과 환영회를 하였고과거에 은혜를 베푼 자의 집에 찾아가 과거를 회상하였다그리고 한편으로 어머니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것을 아쉬워했다백범은 전국을 순회하며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이는 동포 중에는 어느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김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판했다.[18] 1945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백범은 즉각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백범에게 해방 후의 반탁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큰 목표를 향하여 각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야 말로 백범이 믿고 있는 민주주의이다백범은 우리 민족으로서 해야 할 최고의 임무로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로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백범은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는 불완전하므로 인류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봤다.[19] 그러나 백범은 이와 동시에 어느 한 학설을 표준을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옳지 아니한 일이라고 주장한다왜냐하면 나라의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를 기반으로 형성된 법률에 따르는 자유의 나라에서만인류의 가장 크고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20]

 

 

2.  백범의 리더십

백범은 청년 시절 동학농민운동의 접주와 의병활동으로 활약하였고 임시정부를 이끌며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주도하였으며 한국 독립당 규합과 광복군 창설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하였다또한 해방 이후에는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주도하고 죽는 그날까지 외세의 간섭 없는 평화통일에 헌신했다.

 

백범의 리더십은 리더가 일방적인 능력을 발휘한 리더십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소통하며 형성한 리더십이다그의 리더십은 인간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백범은 항상 열린 마음으로 부하와 동료들과 공존공생 관계로서 대의와 헌신인간존중정과 의리로서 투쟁과 결사의 인적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였다.

 

임시정부시절 항상 부하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따뜻한 인간애를 통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였다김구는 리더십을 권위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관계로 인식하였다이는 백범(白凡)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낮추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김구는 신분과 재산 등 상대가 처한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지나친 권위주의나 서열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김구는 감옥에 있을 때 동료 죄수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동지들과 애국지사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 대해서도 철저히 배려하였다어진 마음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봉사정신과 자기 희생정신을 가진 인물로서 신의를 중시하고 휴머니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자신보다는 부하들의 공을 앞세우며 양보와 희생으로 통일과 단결을 이끌어 내었다이러한 희생과 봉사는 동학군 접주생활시독립군치하포사건임시정부활동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김구는 누구라도 신분과 재산학식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에 의해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든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김구는 신분과 재산학식과 같은 형식적인 요소에 의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는 휴머니즘과 누구에게든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정과 의리를 중시하였다민족운동과정에서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관련 가족을 ‘대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늘 친가족처럼 돌보았다김구는 자신의 편함보다는 다른 사람의 걱정을 먼저하고 고생을 자처하는 성품이었으며 민족지도자이기 전에 남에게 다정한 리더였다이러한 리더십 관계를 통해 고학력 또는 양반 출신의 독립운동가세탁소 배달원야채장수 등 다양한 처지와 수준에 따라 정과 의리로 개별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이들을 배려하고 이끌어 줌으로써 개인적인 이념과 사상과 수준이 다른 사람들을 단결시켰다.[21]

 

이러한 백범의 리더십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믿음과 신뢰이다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백범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다고 한다백범은 사람을 면밀히 관찰하여 일단 믿게 되면 전폭적으로 지지 및 지원함으로써 타인과의 신뢰가 형성되어 결국 이봉창 등과 같은 활동을 이끌어 냈다백범의 신조로서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22]를 통해 그가 가진 소중한 재산은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휴먼 네트워크임을 알 수 있다.

 

3.  인상 깊은 구절

1)  고능선 선생의 위로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중략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중략고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그 마음 변치 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자네상심 말게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23]

해당 문구는 김구가 과거를 회상하며 고능선 선생의 말을 옮겨 적은 것이므로김구의 주관에 의해 다소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따라서 김구가 이 말씀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적어도 집필 당시인 상해임시정부 시기에는 저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아끼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그러나 고선생의 저 말씀이 백범에게 어떠한 영향을 구체적으로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다만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말씀이 『백범일지』의 독자이자이 글의 필자인 내게도 또한 위로가 되는 문구라는 것이다부모님 모두 건강하시고부모님 돈으로 편안하게 학교 다니고 있는 필자라 할지라도 만25세가 되도록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왔다고 생각한다특히 작년에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면서 패배감과 젖었고자존감은 바닥을 쳤었다아름다운 서당과 학교 수업을 통해 꽤나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문득‘시험을 다시 치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했다물론 지금은 시간이 약이라는 명언을 몸소 체험하였기에 괜찮지만낙방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아련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런 필자에게 실패의 반복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말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말로 다가왔다김구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당시 김구는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지만자신의 관상이 너무 박한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 결심했었다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였으나동학을 통해 새로 거듭나려는 시도는 바람 잡듯 헛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24]

 

2)  풍수지탄(風樹之嘆)

귀양에서 8일을 보내고 중격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중략하루는 우체국에 갔더니 인이가 와서 인사하기를,

“유주서 할머님께서 병이 나셨는데빨리 중경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신이와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어머님의 병은 이후증이니의사의 말을 듣건대 광서 지방의 풍토병이라 한다고령만 아니라면 수술을 받을 수도 있고 병이 초기이면 다룰 방법이 있으나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고 한다.

어머님께서 오실 줄 알고노쇠하신 어머님을 모실 성심을 품고 중격으로 온 일가족이 있으니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유진동 군과 그 부인 강영파이다. …… 그들은 어머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나의 형편을 알고자신들이 어머님 시중을 들겠으니 나는 마음 놓고 독립사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었다그들이 그런 성심을 품고 남안에 도착하였을 때어머님은 이미 인제의원에서도 손을 놓고 퇴원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25]

해당 문구는 곽낙원 여사께서 유명을 달리하시는 상황에 대한 백범의 회고다『백범일지』의 곳곳에 백범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예를 들어상해로 망명하기 이틀 전이 어머니의 환갑이었으나시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음을 기약했지만 그 다음은 결코 없었던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또한 해방 이후에 순회를 하는 동안에도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흘린다일본인을 죽인 혐의로 해주감옥에서 인천감옥으로 이감되던 길에 함께 쉬었던 효자 이창매 묘비 앞에서는 눈짐작으로 어머니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보기도 하며이제는 다시 뵐 수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워한다.[26] 그 밖에도 많은 구절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는데백범의 삶을 돌아보면 어머니께 끼친 고생을 이루어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애정의 깊이도 가늠하기 힘들다고 느꼈다특히 인용한 구절에서 어머니를 모시려던 그의 마음이 어머니의 별세로 허사가 되었으니자식은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님께서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4.  감상 및 자기 반성

사실 나는 『백범일지』는 4 6개월 전에 읽었다는 사실 조차도 잊고 있었다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내 블로그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글 중의 하나가 내가 쓴 『백범일지』 독후감이었던 것을 알았다방문 연령층은 주로 10대와 20대였으며 간혹 50대도 있었다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대부분 여성이었다는 점이다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한다면어째서 10대 또는 20대의 여성은 내 글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그래서 읽어 본 결과이 글을 그들의 과제를 위해 참고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부끄러움이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매끄럽지 않은 글핵심 내용을 담지 못한 요약 등 백범일지를 읽은 자가 쓴 글이라고 볼 수 없는 졸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초에 이 요약서를 작성하기 위한 독서를 함에 있어서 한 가지 목표하는 바가 있었다바로 지금의 나는 4 6개월 전의 나보다 더 나은 판단 능력과 작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자는 것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지난 독후감에서는 전혀 다루지 못한 점을 다루고 싶었다이번 독서에서는 백범의 단점과 그가 했던 행동이 과연 우리의 독립에 도움이 되었는가그리고 해방 이후에 그의 행보가 진실로 옳았던 것일까 등을 비판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당초 가졌던 목표가 얼마나 하찮고 추잡한 것인지 알게 되어글의 방향을 완전히 선회했다『백범일지』는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자가 쓴 글이기 때문에이 글에는 자신에 대해 일정 수준의 미화가 되어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감히 어느 누구도 잘못을 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는 비난을 잠깐 짚고 넘어가면 다음과 같다백범이 독립운동으로 한 게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백범이 한 독립운동은 결국 폭탄 테러 밖에 없지 않은가백범이 대한민국의 건국과 운영에 추호의 도움이 된 법안이나 제도가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지는 않으나 이는 백범의 독립운동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백범은 우리나라의 구한말에는 신분체제에 저항하기 위하여일제강점기에는 민족 해방을 위하여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민족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교육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왔다그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이 주된 것이 아니라 교육 계몽운동이 주된 것이었다『백범일지』에서 자신의 본격적인 교육활동은 아버지의 탈상 후, 1903년 기독교에 입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또한 그는 안악·신민회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직접 학교를 설립하고자신의 학교뿐만 아니라애국지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도 교원생활을 하고애국계몽 연설회 등 교육운동도 전개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조국 광복 이후 환국하여 건국·통일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한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하고정계 은퇴 후에는 백범학원과 창암학원을 세워서 실향민이재민부모 잃은 고아 등을 대상으로 하여 교육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27] 다만한인애국단 활동은 어려운 임시정부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시도였고한국광복군은 한인애국단 활동의 후광으로 모은 재정을 기반으로 하여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를 테러 행위의 주모자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행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판단이다게다가 망령정부의 특성상 고국의 동포에게 실효성 있는 제도나 서비스를 제공할 형편이 안 되었으며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이 임시정부의 정부 활동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백범은 법이나 제도와 같은 현실적인 것보다는 민족의 계몽이라는 교육 활동에 힘쓸 수밖에 없었던 점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백범일지』를 읽으며 독서를 통해 이전의 나라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이번 독서에서 나는 백범의 성공의 원동력을 휴먼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찾았다이 전의 나는 백범이 운이 좋게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이는 겉만 보고 속은 보지 못한 판단이다백범은 휴먼 네트워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잘 운영하여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으로 삼았던 것이다아무 것도 없는 상놈의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 활동을 위한 집과 전답과 학교를 전부 휴먼 네트워크를 통해 마련하였으며임시정부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나 인력도 상당 부분 백범의 휴먼 네트워크를 통해 충당되었다이전에 휴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배웠음에도 아직까지 휴먼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데에 전혀 노력하고 있지 않은 나를 돌아보며백범이 휴먼 네트워크를 자양분으로 하여 위대한 일을 수행한 것처럼 나도 휴먼 네트워크에 집중할 필요성을 느꼈다이를 위해서 나 또한 백범처럼 좋은 사람을 바라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타인에 대한 신뢰를 보이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갖춰가겠다.

 

 

IV. 참고 문헌

 

1.  자료

김구『백범일지』도진순 주해돌베개, 2002

 

2.  논문

한민석「백범 김구의 교육실천 및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96, 2015

전명숙「白凡의 政治 社會 思想」『인제대학교 교육학석사학위논문』, 2006

윤유석「역사 문화자원의 소통과 스토리텔링 방안 연구  자서전 『백범일지』의 서사를 중심으로」『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조현봉「리더십의 윤리문화적 접근 모형한국의 리더십 사례를 중심으로」『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1] 한민석「백범 김구의 교육실천 및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96, 2015 2, 1쪽 인용

[2] 전명숙「白凡의 政治 社會 思想」『인제대학교 교육학석사학위논문』, 2006 8, 12-13쪽 참조

[3] 윤유석「역사 문화자원의 소통과 스토리텔링 방안 연구  자서전 『백범일지』의 서사를 중심으로」『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2, 18~20쪽 참조

[4] 김구『백범일지』도진순 주해돌베개, 2002 13-15쪽 참조

[5] 전명숙앞의 논문, 6-12쪽 참조

[6] 김구앞의 책, 42쪽 참조

[7] 동학에서는 도를 전한 사람을 연원이라 하고도를 받은 사람을 연비라고 한다.

[8] 동학의 조직체계는 포접제인데접은 접주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 기초조직이다.

[9] 김구앞의 책, 94쪽 참조

[10] 김구앞의 책, 196쪽 참조

[11] 김구앞의 책, 203~204쪽 참조

[12] 김구앞의 책, 267쪽 인용

[13] 김구앞의 책, 302쪽 참조

[14] 김구앞의 책, 310쪽 참조

[15] 김구앞의 책, 352~353쪽 참조

[16] 김구앞의 책, 296쪽 참조

[17] 김구앞의 책, 399~400쪽 참조

[18] 김구앞의 책, 423~424쪽 참조

[19] 김구앞의 책, 425쪽 참조

[20] 김구앞의 책, 427~429쪽 참조

[21] 조현봉「리더십의 윤리문화적 접근 모형한국의 리더십 사례를 중심으로」『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12, 143~146쪽 참조

[22] 김구앞의 책, 307쪽 인용

[23] 김구앞의 책, 61~62쪽 인용

[24] 김구앞의 책, 61쪽 참조

[25] 김구앞의 책, 376~377쪽 인용

[26] 김구앞의 책, 420쪽 참조

[27] 한민석앞의 논문, 38~3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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