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과 주님에 대한 회심
- Aurelius Augustinus, 『고백록』, 성염 역주, 경세원, 2016년 -
목차 I. 여는 글 1. 저자 소개 2. 진리란 무엇인가? 3. 집필 시기와 목적 II. 『고백록』 전반부 1. 『고백록』 제1권부터 제9권 2. 『고백록』 제10권 III. 『고백록』 후반부 1.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 찬가 2. 제11권: ‘시간의 철학’ 3. 제12권: ‘태초의 창조’ 4. 제13권: ‘6일창조’의 영적 의미 IV. 나의 고백 V. 참고 문헌 |
I. 여는 글
1. 저자 소개[1]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서기 354년 당시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지방 관리인 아버지와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말기,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과 고전 문학, 그리고 철학을 배웠고, 카르타고, 로마, 그리고 밀라노 황실에서 수사학 교수직을 담당하면서 당대에 풍미하던 사상계를 섭렵하였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학문 탐구의 근저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의 생애를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진리를 향한 구원의 불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삶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는 치열하게 사랑하였다. 그가 보기에 사랑은 인간의 의지를 온통 사로잡고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대상을 감싸 안는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진리란 ‘하느님’이었음을 선언한다. 그가 일평생 찾아 헤맨 진리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느님’에서 발견하였을 때에 그는 하느님만을 섬길 각오를 다졌다. 이 후 그는 44년간 수도자, 성직자로서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다’고 되뇌었다. 성서를 제외하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혀 온 『고백록(Confessiones)』은 문학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그의 가장 독창적인 대표작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로마 제국의 몰락을 목격하고 그리스 로마의 이교도 문화가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여유의 안식을 찾는 것’임을 깨닫고 참된 평화를 기도했다. 이 기도 속에 430년 8월 76세의 나이로 그는 숨을 거둔다.
2.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가장 막연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인류는 막연히 알고 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진리가 어쩐지 완벽하고 절대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인류는 한 번도 진리를 대면한 적이 없지만, 진리의 속성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절대적, 보편적, 그리고 불변함’ 그러나 진리의 속성이라는 것도 사실 진짜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진리의 속성은 누가 알려준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속성의 개면만으로도 충분히 진리의 속성이라고 부르기에 만족스럽기는 하다.[2]
먼저 ‘절대성’이라는 속성은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이 붙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보편성’은 모든 것에 두루 적용되는 공통적인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불변성’은 모양이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성질은 의심하기 어려운 진리의 속성이 된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속성을 충족하는 무엇인가가 실제로 존재하는가다. 가능한 답변은 논리적으로 ‘있다’, ‘없다’, ‘모르겠다’, ‘상관없다’가 있다.[3]
우선 ‘있다’는 절대주의라고 한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단일한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다음으로 ‘없다’는 상대주의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단일 진리는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상대주의는 두 가지 태도로 구분된다. 하나는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니라며 모든 진리를 거부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된 하나의 진리가 없을 뿐 다양한 진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두 견해는 어쨌거나 단일한 진리는 없다는 견해로 맞닿는다. 진리에 대해 ‘모르겠다’는 답변은 불가지론이라고 부른다. 불가지론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존재나 진리와 같은 초월적인 본질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견해다. 엄밀하게 돌아보면 진리의 존재 여부를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만큼 진실에 가까운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상관없다’도 진리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된다. 신이 있다고 해서 혹은 스티븐 호킹이 우주 전체를 설명할 대통일이론을 찾았다고 해서 일상에 달라질 것은 없다. 인간은 매일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밥을 벌어 먹던가 아니면 장래에 도움이 될 무엇을 얻기 위해 매일을 투자해야만 한다. 당장에 쓸모 없는 진리는 필요 없다. 이러한 생각을 실용주의라고 한다.[4]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사상을, 즉 절대주의를 토대로 진리를 찾는 여행을 통해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하기 전까지, 철학에 정진하기로 결심하면서 만사를 이성으로 파악하고 검증하겠다는 합리주의, 마니교에 심취하면서 현실을 이루고 있는 건 구체적인 개별 사물일 뿐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 그리고 스토아 학파를 접하면서 자력만으로 윤리적 정화와 진리에 이르라는 자연주의를 겪게 된다.
3. 집필 시기와 목적[5]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서기 387년 부활절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지 11년이 지난 397년 말(당시 43세)에 자기 생애의 도덕적 사상적 방황을 글로 옮긴 책이다. 본론에 해당하는 전반부(제1-10권)의 내용은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까지의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는 형식이며 출생에서부터 33세의 나이로 개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모친이 별세하기 까지를 담고 있다. 아프리카에 돌아가 수도자로, 사제와 주교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그 즈음을 추가한 것이 제10권, 그리고 천지창조라는 신학주제로 시선을 옮겨 사변적 통찰을 한 바가 후반부(제11-13권)를 이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무릇 고백이란 찬미하는 사람의 고백이거나 뉘우치는 사람의 고백이다.”라고 하거나, ‘그대의 죄를 단죄하는 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라고 했다. 따라서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내용은 ‘찬미의 고백’과 더불어 지은 ‘죄의 고백’ 그리고 창조사상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의 선업을 두고는 안도의 한숨을, 저의 악업을 두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라고 하겠습니다. 저의 선업은 당신의 업적이자 당신의 선물이며, 저의 악업은 저의 죄악이자 당신의 심판입니다. 저 형제 같은 마음에서 마치 당신의 향로에서 향이 타오르듯, 찬가도 울음도 함께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저자의 의도를 독자들이 알고 악의 어두운 심연이 자신과 주변을 에워도 실망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뜻이라고 집필한 목적을 밝혔다. 아울러 중간 중간에 나오는 ‘악의 형이상학’과 ‘자유의지론’, 제2부에서 다뤄지는 ‘창조론’과 ‘시간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신앙’에 해당한다.
II. 『고백록』 전반부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에 정착하기까지의 사상적 전기를 크게 세 차례로 나눈다. 첫 번째는 18세에 키케로의 『철학권유서(Hortensius)』를 읽고서 철학에 전념하여 지혜를 발견하겠다는 각오를 세운 때이고, 두 번째 단계는 밀라노에서 플로티누스를 비롯한 신플라톤학파의 서적들을 읽고서 악의 문제와 회의론, 영혼의 비물질적 성격을 사변적으로 해소한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밀라노 정원의 밤에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동요 “집어라! 읽어라! (Tolle, Lege!)” 를 들으면서 여자에 대한 질긴 애욕을 끊고 진리 탐구와 신앙 생활에 헌신하기로 결단을 내린 사건이다. 세 단계는 그의 철학과 신학 체계의 수립에 장애를 이룬 세 가지 난관(합리주의, 유물론, 자연주의)을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6]
1. 『고백록』 제1권부터 제9권
(1) 죄의 고백
1) 제1권 출생 및 어린이, 소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첫머리를 “주님, 당신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 받으실 분이십니다. 당신의 권능은 크고 당신의 지혜에는 한량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 곧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한다.[7] 그리고 자기의 생의 시작부터 15살까지의 삶에서 여러 가지의 죄, 즉 하라는 것은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했던 죄들을 시인하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삶의 배후에서 인도하시고, 온갖 선물을 주시고, 자신의 존재함조차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8]
2) 제2권 내 나이 열여섯
아우구스티누스는 16살 되던 해에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중단하고 일년간 부모님 집에서 쉰다. 그는 쉬면서 태만과 정욕으로 보냈던 청년기를 회상하며 하느님께 고백한다. 그는 남의 배를 잔뜩 서리한 이야기를 고백한다. 그는 도둑질을 한 동기로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탐내던 것을 향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도둑질과 죄악을 향유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훔친 배를 먹지 않고 돼지들에게 던져주었다고 한다. 또한 함께 범죄하는 자들의 유대가 범죄자에게 쾌감을 준다는 죄의 집단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훔친다는 일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하였으므로 혼자였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9]
3) 제3권 카르타고에서 연학에 몰두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카르타고 유학시절의 생활, 즉 쾌락을 추구한 생활을 회상한다. 그때 그가 읽은 키케로의 『철학권유서』는 그의 성정을 아주 바꾸어 놓았고, 그의 기도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변화 시켰으며, 그의 소원과 열망을 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까지 품어왔던 그의 헛된 희망은 어느덧 모조리 시들해졌고 그의 마음은 이제 불명의 지혜를 추구하는 욕구로 믿기지 않을 만큼 갈증에 헐떡이면서 당신께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키케로의 저술을 읽고 지혜에 대한 큰 갈망을 느낀 그는 지혜라는 것을 어디서 찾을까 헤아리다 우선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성경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살펴보았을 적에 튤리우스의 품위에다 비교하기에는 적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10]
결국 그는 마니교 신도들을 만나 쉽게 빠져들었다. 특히 그 청년을 매료한 점은 진리에 대한 숭상, 종교 신앙을 비웃고 이성을 강조하던 합리주의, 구약성격에 대해 조롱을 일삼으면서 마니교야말로 합리적인 그리스도교라던 주장, 악의 문제에 대해 명료하고 솔깃한 해답 등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훗날에 “진리여! 사람들이 당신을 외칠 적에, 그렇게도 흔하게 그렇게도 다채롭게, 때로는 소리로만 때로는 많고도 큼직한 책자로 당신을 소리 내어 드러낼 때, 내 영혼의 정수가 얼마나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습니까!”라며 지난날을 후회한다.[11]
4) 제4권 9년간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교사를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 동안 마니교에 깊이 빠져 그 종교의 미신에 유혹되어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실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자기 고향인 타가스테에서 남을 속이는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한다. 그간 그는 점성술에도 깊이 빠져 그것에 의해서도 속고 속이는 생활을 한다. 그는 고향에서 깊이 사귄 친구와 사별을 한다. 친구를 잃고 그는 인간생명의 무상함을 절감하며 슬퍼한 나머지 그 슬픔을 잊으려고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간다. 그는 자기가 처음으로 쓴 책 『아름다움과 적합함』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기가 20살 때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십범주』와 다른 철학 책들은 자기의 삶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2) 믿음의 고백
1) 제5권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5권을 “제 혀의 손길로 바쳐드리는 제 고백의 제사를 받으십시오. 당신 손수 빚으셨고 당신의 이름에 고백을 바치라고 재촉하신 혀입니다. 그리고 제 모든 뼈를 낫게 해주시어 ‘주님, 누가 당신과 같습니까?’라고 말씀드리게 해주십시오.”의 믿음의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다.
“악은 우주내의 실체다. 선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선한 신과 맞서는 반대원리에 해당한다. 인간도 두 영혼, 곧 선하고 악한 두 의지를 갖고 태어난다.”는 미니교의 교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이 저지르면서 헤어나지 못하는 악행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토하는 말을 따르면 “저에게는 죄를 짓는 것은 저희 자신이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저희 안에 있는 다른 본성이 죄를 짓는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탓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제 오만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또 내가 무슨 악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뭔지 모르지만 저와 더불어 있으면서도 제가 아닌 다른 무엇에다 탓을 돌리기를 좋아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마니교에 머물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물론, 이원론, 범심론이 실재세계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도라는 생각했다. 그가 카르타고에 다시 와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중에 마니교의 감독인 파우스투스가 그 곳에 온다. 그와의 대화에서 환멸을 맛보면서 더 이상 마니교를 옹호할 열성이 없어져서, 그는 로마로 간다. 그곳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아카데미과의 이론을 받아들이다. 얼마 후 그는 간사한 로마의 학생들에 대해 실망하던 중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을 받아 간다.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와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의 도움으로, 그리고 아카데미과의 비판적 시각을 통해 마니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교회의 예비신자가 된다.
2) 제6권 나이 서른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밀라노에 와서 자기 아들이 교회에 나간 것을 보고 기뻐한다. 둘 다 암브로시우스를 존경하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을 듣고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고,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여자의 문제로 고민을 한다. 그는 이러한 고민을 자기의 제자이자, 친구인 알리파우스와 네브리디우스와 함께 나누며 습관의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가중되어 간다.
3) 제7권 진리를 향한 상승의 길
아우구스티누스는 31세 때의 일을 상기하며 선의 본성, 악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마니교의 가르침을 비판한다. 마니교는 영적 실체를 상상 못하는 유물론을 가르쳤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다른 실체를 생각도 못했다. 또한 “신이 부패 하는가, 부패하지 않는가? 부패한다면 절대자가 아니다. 부패하지 않는다면 절대자이니 그에게 대척하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라는 양도논법이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12]
그는 신플라톤주의 책들을 읽고 그는 만들어진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가 파악되어 드러나고 있으니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살아있음을 의심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논지를 편다.[13] 누구든지 진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자기로서는 의심을 하지 않는 진실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리 자체를 존재하지 않고는 진실한 사물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물질적인 세계를 초월해 있는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들어가고 나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눈으로 그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봤다고 서술한다.[14] 그리고 신은 영원한 존재자라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다 좋다는 것과 악은 실체가 아니고 선의 결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실체라면 부패하지 않는 실체이거나 (이것은 당연히 위대한 선이다) 부패하는 실체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이 경우도 선한 실체가 아니라면 부패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들었음과, 만들지 않은 실체들은 아무것도 없음이 확실해졌다.[15] 그리고 더 나아가 죄악은 최고 실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빗나가 아주 저급한 것들으로 향하는, 자기 내면을 팽개치고 바깥으로 부어오르는 인간의지의 전도임을 깨닫기에 이른다.[16]
4) 제8권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께 회심
아우구스티누스는 장삼이사도 해내는 금욕을 해내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해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하느님이신 주님 안에서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분께 자신을 마음 놓고 던지면 자신을 안아주고 고쳐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죄악을 절감하고 괴로워했다.[17]
그는 정원으로 들어가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서 슬퍼 울며 내적 싸움을 하게 된다. 혼자서 속으로 자기 환멸에 통곡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이웃집 어린애들이 부르는 동요를 듣는다. “집어라! 읽어라!” 그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고서, 성서를 펴들고 거기 눈에 들어오는 첫 대목을 읽으라고 하늘에서 시키시는 것 외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하고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그는 눈이 가서 꽂힌 첫 대목을 소리 없이 읽었다.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확신의 빛이 그의 마음에 주입이 되어 의혹의 어둠이 사라져 회심을 하게 된다.[18]
5) 제9권 세례와 아프리카 귀환
회심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교수직을 사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카씨키아쿰으로 가서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그는 거기에서 성서 말씀을 명상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놓고 대화도 나누면서 세례 준비를 한다. 그후 밀라노로 돌아가 알리피우스와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세례 후 그들은 아프리카로 귀환하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중 어머니와 함께 신비체험을 한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한다.
2. 『고백록』 제10권 하느님을 찾고 인식하여
제1~9권에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죽음까지를 이야기한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현재 상태의 모습을 분석해 말한다. 그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바는 공간이 담지 못하는 무엇, 시간이 붙들지 못하는 무엇, 실컷 먹어도 줄지 않는 무엇, 흡족하고도 풀리지 않는 무엇이 사로잡고 있는 존재라는 점이라고 말한다.[19] 인간이 감각과 사유, 욕구와 탐구를 통해서 찾는 바는 행복이고, 무한하고 끝없는 행복을 찾는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이 찾는 대상은 하느님인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기억의 힘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자기의 기억 안에서, 기억을 통해서 자기의 영혼이 하느님께 오르는 과정을 논한다. 그는 누구나 동경하는 행복, 아마도 타고난 기억 속에 그 행복이, 마치 이미 체험했는데 어디선가 잃어버린 무엇처럼 인각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인간의 기억 속에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은 현전한다고 말한다.[20]
그는 또한 세 가지의 유혹,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싸우면서 성화의 과정을 밟고 나감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모든 설득을 당하고서도 마지막까지 그를 사로잡던 육욕은 이제 철저하게 절제되고 있으나 꿈으로 떠오르는 쾌감은 여전히 남자인 그를 괴롭혀 죽음이 승리에 삼켜져버릴 즈음에나 안팎이 당신을 모시고 그 평화를 얻기에 이르리라는 희망으로 버티고 있다고 토로한다.[21] 이어서 미각, 후각, 청각, 시각도 어떻게 절도를 지키는지 털어 놓는다. 그러나 그가 철저하게 경계하는 바는 정신적 악덕, 특히 호기심과 오만이었다. 호기심은 문화적 소양, 과학적 탐구, 종교적 명분까지 내세우는 나날의 지식과 호기심을 돋우는 유혹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때론 실수했다고 고백한다.[22] 또 진리를 발견하는 환희, 탁월한 정의감, 이웃에 대한 애덕을 표방하지만 남의 칭송에 대한 욕심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우월감과 자기만족이 가져오는 오만은 당해내기 어려웠다고 한다.[23]
자력구원과 진리 터득을 자신하던 오만한 지성인이 끝내 “좋으신 아버지, 당신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셨고 불경한 자들을 위해 그를 넘겨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드님,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분이 피로서 저를 구속하셨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전반부를 마친다.[24]
III. 『고백록』 후반부
1.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 찬가
자기 영혼과 하느님이라는 두 대상을 일평생 탐구하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한 생애에 베풀어 준 은덕을 두고 하느님을 찬미하다 그 시선을 광활한 우주로 돌리면서 창조주 하느님이 삼라만상에 베푸신 선을 두고 감사를 드리는 우주 찬가가 『고백록』 후반부이다. 창조론을 사변적으로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첫째로, 세계는 절대 존재로부터의 필연적 유출물이 아니고 창조주의 자유의사에 따라 무(無)에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상을 확립한다. 피조물과 창조주, 시간과 영원 사이의 그 엄청난 간격을 고려하면, 원천을 회귀하는 데는 그 무한한 존재론적 간극을 메우는 중개자 혹은 구원자 편에서 거저 주는 은총이 절대 필요함을 절감하기에 이른다. 둘째, 피조계가 원천인 한 사람에게서 멀어짐은 질료와 섞이면서 발생하는 필연적 타락이 아니고, 지성을 가진 천사와 인간이 감행하는, 자유의지에 의한 고의적 타락이다. 그리고 자발적인 죄로 약해진 의지에는 중개자의 치유와 은총 없이는 회복이 어렵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존적 체험이 제시된다.[25]
2. 제11권: ‘시간의 철학’
(1) 세계라는 피조물[26]
제11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려는 바는, 자기 생애를 회상할 적에 하느님이 아우구스티누스 개인에게 베풀어 주신 은덕에 비추어, 「창세기」에 기록된 글, 하느님이 “천지를 만드신 태초부터 당신을 모시고 영속할 당신의 거룩한 도성의 왕국에 이르기까지의 현의, 곧 구세주의 역사의 서막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는 모세의 글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1)”라는 구절에서 성찰을 시작한다. 먼저 “어떻게 만드셨느냐?”라는 물음에서 그는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생겨났다(시편 32,9)”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당신 말씀으로 그것들을 만드신 것입니다.”라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영원히 발설되고 있는 말씀이며,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영원히 발설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27]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이 발설되었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말씀을 태초라고 부른다. 그리고 성서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분께서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라는 구절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라는 구절을 병합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역사적 인물과 말씀이 동일한 존재로 숭상받음을 그는 발견했다.
그런데 사물이 만들어졌다는 말은 “세계가 시간상으로 시초가 있다”는 명제를 함의하므로 “시간이란 무엇인가?” “천지창조 이전의 시간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띨까?”라는 의문을 초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하느님과 당신의 한 줌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해후를 영원vs시간이라는 도식에서 본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창조주에게 어떤 시간의 경과를 요구하지 않았듯이 하느님이 시간적 피조물에 관해서 알고 있는 인식은 시간으로부터 추상된다는 것이 답이다. 세계 또는 사물의 실제 존재와 시간의 존재는 동시에 시작하는 까닭에, 즉 인간이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을 의식하는 인간의 출현 이전에는 시간 개념이 무의미하고, 시간도 공간도 인간이라는 주체가 감각적으로 경험을 파악하는 범주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시작인 창조와 그때를 상세히 논하면서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하는 질문에 답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세상을 시간 안에서 창조하지 않고 시간과 함께 창조했으므로 창조 이전의 시간은 그때를 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지 않는다면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시간의 경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8]
(2) 시간의 철학[29]
시간이란 무엇인가? 인류는 시간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서에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께서 만물을 동시에 창조 하셨다(집회서 18,1)”이 나와있다. 인류가 경험하는 과거와 미래는 비교적 뚜렷하다. 심리적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지속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현재가 만일 항상 현재로 있고 과거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가 시간으로 존재하려면 과거로 옮겨가야 하고 과거로 옮겨감으로서 시간이 된다는 점에서 현재가 현재로서 존재하지 않아야 현재가 되는 역설적인 성격을 시간은 담고 있다.[30]
물체의 운동하는 물체를 관찰하면서 사람들은 운동의 지속을 시간으로 측정한다. 시간은 운동의 지속과 연관되며 운동 자체와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의 간격 내지 지속을 체험하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는 시간이란 영혼의 확장이라는 정의를 내세운다.[31] 그는 미래와 과거는 인간의 기억에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기억은 항상 현재이므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시간이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다.[32]
아우구스티누스는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시간의 흐름이 아예 없을 것이고 하느님의 이념은 영원하리라고 추측한다. 항구하지 못한 모든 사물들의 원인들이 하느님 앞에 항존(恒存)하고, 가변적인 모든 사물의 불변하는 원천들이 하느님 앞에 상존(常存)하며, 이성을 못 갖추고 시간적인 모든 사물의 영구한 이념들이 하느님 앞에 생존(生存)하고 있는 것이다.
3. 제12권: ‘태초의 창조’
제11권에서 창조와 시간의 문제를 다룬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1과 1,2을 해석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첫 구절에서 말하는 하늘을 눈에 보이는 천공보다 추상적으로 이해하여 삼라만상에서 가장 먼저 창조된 하늘의 하늘, 천사라는 영적 실체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또한 땅은 인류가 발 닫고 사는 지구가 아니고 다음 절의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것, 무형의 질료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하느님은 무형의 질료로부터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드셨다고 말함으로써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학적인 뜻을 규명한다. 그는 창조에 대한 해석을 하는 자는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사랑의 덕을 세우는데 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하늘의 하늘
하늘의 하늘로 일컬은 영적 피조물도, 꼴을 갖추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이라고 일컫는 무형의 질료도 하느님이 창조 받은 피조물이다. 단지 그들은 하느님처럼 영원하지는 않지만 시간에 앞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는 창조된 즉시 하느님의 영원성 안으로 형상화 했으나, 후자는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건너갈 능력이 없어서 하느님의 엿새의 창조를 기다려야 했다고 설명한다.
(2) 무형의 질료
무형의 질료라는 표현은 “당신의 전능하신 손, 무형의 물질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손(지혜서 11,18)”이라는 구절에서 기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모든 사물은 형상화한 사물인데 창세기 둘째 구절에 나오는 무형의 질료는 구체적으로 사물이 출현하는 6일 창조와는 구분되면서도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무엇처럼 서술한다. 물론 형상화한 사물도 무형의 질료도 단일한 창조주의 단일한 업적이고, 질료와 형상이란 시간의 선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어서 이 두 존재는 함께 창조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나타난 무형의 질료와 엿새 동안 말씀에 의해서 이 질료가 구체사물로 형상화 하는 일은 시간상으로 아니고 개념상으로 구분된다.[33]
아우구스티누스는 만물이 하느님에 의해 존재하고, 하느님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무엇이든 최고로 선한 그분에 의해서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형의 질료를 위시 해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에서 유래하는 바로 하느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명제를 확립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무엇으로 세상을 만들었나 하는 물음에 무로부터 라는 답변을 확립하였다. 그는 무형의 질료는 하느님이 무로부터 거의 무에 가까운 것으로 창조한 것이고 사람의 자식으로서 인류가 탄복할 만한 훌륭한 것들은 그로부터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34]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라는 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지혜로 하느님이 무로부터 천지를 창조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태초에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 지각 가능한 피조물, 또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문장으로 그의 창조사상이 종합된다.[35]
4. 제13권: ‘6일창조’의 영적 의미
제13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의 첫 구절을 되받아 “당신 선물에서 저희가 안식을 얻습니다. 거기서 저희가 당신을 누립니다. 저희의 안식이 곧 저희 자리입니다”라고 화답한다.[36] 실존적 불안으로 존재 원천을 찾는 인간의 탐구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에게서 존재론적 안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저의 하느님, 저의 자비시여, 당신을 제가 부릅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지어내셨고, 당신을 잊어버린 저를 당신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라는 신학적 고백으로 정리되고[37], “당신의 충만한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창조계가 존속하며, 그래서 창조된 선이 없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선이 당신에게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또 당신과 동등하지도 않으며, 단지 당신께로부터 생겨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존재가 결여되지 않은 것입니다.”라는 철학적 선언으로 다듬어진다.[38]
(1) 창조의 영적 의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자기 영혼이 은총으로 정화되어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그야말로 새로운 삶이었으므로, 태초의 천지창조를 새로운 창조라는 종말론적 시각에서 우의적으로 풀어보려고 시도한다. 또한 하느님의 영이 창조계를 정화시켜 근원으로 복구시키는 역할을 묘사함으로써 특유한 성령론을 진술하기도 했다. 특히 창조 때 나타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위치와 사명, 그리고 좋으신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의 좋음을 말하고 있다.
제13권에서 6일 창조의 영적 의미를 해설한다. 엿새 중의 첫 날의 창조에서 이루어진 바는[39] 하늘이라 불리는 영적 피조물이 창조 받는 순간 하느님을 향해서 결단하는 전향을 이루면서 영적 존재로 형상화하였고, 그 날 창조된 빛이란 그 피조물들의 지성에 내리는 신적 조명을 가리킨다고 소개한다.[40] 이어서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의 물질세계 창조에 대한 우의적이고 영성적인 풀이가 나온다. 둘째 날 생겨난 궁창은[41] 성경을 가리키고, 셋째 날 물이 하늘 아래와 하늘 위로 나뉨은[42] 신앙인들의 영역과 속인들의 영역을 갈라놓은 우의라고 풀이한다. 넷째 날 궁창에 나타난 성좌들은[43] 영적 인간들이 벌이는 안간 계도 활동을 상징하고, 다섯째 날 등장한 파충류와 용과 괴물은[44] 교회가 전수하는 성사, 기적, 그리고 복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이라고 풀이한다. 여섯째 날 하느님의 입김을 받아 지상에 등장하는 생명체는[45] 성령의 영감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듯이, 세상사와 지상사물에 관해서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한다. 특히 하느님이 축복한 인간의 출산력[46]은 인간 지성에 깃드는 개념과 이념이 풍부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 대신 지상에서 씨를 내는 식물과 열매 맺는 나무들은[47] 신앙인이 성취할 수 있는 자선사업들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48]
아우구스티누스는 안식이 곧 피조물의 자리라고 보았다. 사랑이 인류를 그리로 떠받치고 하느님의 선한 영이 죽음의 문턱에서 인류의 비천함을 들어 올린다. 그는 선한 의지 속에 평화가 있다고 말한다. 물체는 그것의 중심에 따라서 제자리로 기운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자리로 기운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하듯이, 자기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자리를 찾는다.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하다. 인류의 중심은 인류가 가진 사랑이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끌려간다.[49] 이것은 인간 실존 고민의 근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실존의 가장 심각한 세 질문을 제기한다; “어느 인간이 이런 깨달음을 인간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천사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 어느 천사가 인간에게 베풀어주겠습니까?”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답은 오로지 하느님에게 청할 일이고 하느님 안에서 찾을 일이고 하느님께 문 두드릴 일이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얻고 그래야만 찾고 그래야만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50]
(2)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세계의 기원에 관해 창조설을 주창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계를 내려다보는 창조주의 시선을 소개한다. 하느님이 당신의 영 안에서 우리를 보고 우리 안에서 만유를 보면서 참 좋았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우리도 피조물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것들이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으면서 그것을 만들고 베풀어 준 하느님을 향유하기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 안에서 무엇이 좋다고 볼 때는 그들이 아니고 하느님이 좋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류는 성령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좋다고 본다.[51]
아우구스티누스는 제13권 후반부에서 창세기 1장 해설을 다시 개괄하고 제11-12권에서 창세기 첫 구절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문장을 풀이한 길고도 심오한 해설을 다시 한 번 간추리며, 제13권에서 창세기 1장을 우의적으로 해석한 바를 총괄한다.[52] 창조론을 닫으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와 구원이 하나라고 설파한다. 세계를 관찰하는 것은 철학과 신학의 영역이지만 창조된 현상 세계는 그저 표상이고, 지상의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의 표상이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순서에 따라 만들어지거나 기록될 필요가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것이 좋다고 한꺼번에 전부로는 참 좋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외아드님 안에서 하늘과 땅, 곧 교회의 머리와 몸이 모든 시간에 앞서 예정되어 있었음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간파한 것이다.[53]
IV. 나의 고백
『고백록』은 원래 내게 배정된 도서가 아니었지만, 나의 어리광으로 인해 최유빈 양이 사실 양보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사실 『고백록』을 하겠다고 억지를 부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리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나열하지는 않는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이유는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하느님에게 내 죄를 고백하기 위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내가 지금 어떤 글을 쓸지 이미 아셨고 앞으로도 아셨고 전에도 아셨다. 따라서 여기에 글자로 성토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기억하시는 내용을 다시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지금의 내 죄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내가 죄의식을 굳건하게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독자에 따라 밑에 있는 글은 읽지 않을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
2016년 성탄 판공성사 때이다. 대한민국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일 년에 두 번, 성탄과 부활 시기에는 고해성사를 의무적으로 보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판공성사라고 부른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판공성사를 받기 위해 고해소에 꿇고 앉았다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죄를 고백해야 했다. 내게 고해성사는 8개월만에 하는 것임을 밝힌 후에 나는 미사에 수차례 오지 않고 주님을 멀리한 죄를 고백했다.
신부님은 잠깐의 침묵을 하고 내게 보속을 주셨다. 그리고 나의 고해를 보신 신부님은 그날 말씀의 전례 시간에 고해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고해하러 오면서 미사에 오지 못했다는 고해는 하지도 말라고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 조차도 총 10권에 달하는 『고백록』에서 죄를 고백했는데, 성인도 아닌 평신도가 몇 개월만에 고백한다는 죄가 미사 불참이라는 것은 진정으로 참회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신부는 이 모두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나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의무라고 하니까 억지로 아무 말이나 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잊고 있었다. 나의 죄를. 다행스럽게도 2학기 선정 도서에 『고백록』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나의 죄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고백록』을 읽으면서 지난 죄를 다시 상기한 것만이 내가 얻은 전부는 아니었다. 대성인 덕분에 그 동안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나의 죄를 하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오만’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누군가에게 칭찬 받고 인정 받는 것이 참 좋다. 칭찬을 좋아하는게 무슨 죄냐고 묻는다면, 맞다 인정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내 행동이 인정을 받기위해 이루어진다는 행동 동기와 그러한 인정을 받았을 때 밀려오는 오만함이 나의 대죄이다. 아름다운 서당 활동도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시립대반 동료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왜 이렇게 사냐고 물을 때가 많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쾌락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산다고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어떠한 쾌락도 무언가를 해냈을 때 오는 성취감과 타인의 인정에서 오는 기분 좋은 오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 독서를 통해 이러한 오만은 결코 내 영혼을 살찌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만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이 감정에 휩싸여 있는 한 나는 주님의 자애와 사랑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진정으로 선을 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오만하게도 타인을 평가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 감정의 깊은 곳에 자리한 오만과 과다한 욕구는 평생에 걸쳐 절제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것을 넘어 그 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V. 참고 문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주, 경세원, 2016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한빛비즈, 2014
김선종, 「어거스틴의 『고백록』5권 서론의 이해」,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주, 경세원, 2016, PP11-12 참조
[2]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한빛비즈, 2014, PP20-21 참조
[3] 채사장, 위의 책, PP22-23 참조
[4] 채사장, 위의 책, PP24-26 참조
[5]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15-18 참조
[6]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19 참조
[7]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5 참조
[8]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70-85 참조
[9]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92-104 참조
[10]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112-114 참조
[11]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115-129 참조
[12]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237 참조
[13]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255 참조
[14]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253-254 참조
[15]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256 참조
[16]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260 참조
[17]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02-304 참조
[18]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04-305 참조
[19]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354 참조
[20]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75-383 참조
[21]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86-388 참조
[22]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98-402 참조
[23]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02-409 참조
[24]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13-415 참조
[25]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6-37 참조
[26]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37-40 참조
[27]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24-428 참조
[28]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33-434 참조
[29]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0-42 참조
[30]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35-436 참조
[31]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451 참조
[32]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43-444 참조
[33]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67 참조
[34]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69-470 참조
[35]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488-489 참조
[36]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23 참조
[37]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13 참조
[38]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14 참조
[39] 창세 1,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0]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17 참조
[41] 창세 1,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42] 창세 1,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43] 창세 1,14-15: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44] 창세 1,21: “하느님께서는 큰 용들과 물에서 우글거리며 움직이는 온갖 생물들을 제 종류대로, 또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45] 창세 2,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46] 창세 1,28: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47] 창세 1,2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48]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531-556 참조
[49]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523-524 참조
[50]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71 참조
[51]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64 참조
[52]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P565-568 참조
[53] 아우구스티누스, 앞의 책, P5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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